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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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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27 Sep 2011 16:35: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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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말과 말 사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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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아주 짧고 별 내용 없는 대화에서도 나의 말과 상대의 말 사이, 나의 말과 다음 말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충분히 익지 않은 내용이라도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서둘러 말로 뱉어 둘러쳐버리든지, 정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039;어우, 어색한데?&#039;, 혹은 &#039;어우 썰렁하다&#039;는 식의 말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한다. 그런데 실은 정말의 대화, 저 사람이 한 말에 대한 정말의 내 정서와 생각의 형성은 내 입이 떨어지기 전(혹은 말을 하는 동안의 미세한 간극 속에서)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 말 한마디와 그 다음 말 사이의 간극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순간을 눙치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039;내 생각&#039;, &#039;내 마음&#039;, 혹은 새로운 생각 같은 것들이 싹틀 수 있다. 설익은 생각을 &#039;표현&#039;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익히면서 침묵과 간극의 시간을 견디는 것 또한 중요하다. &lt;br /&gt;
&lt;br /&gt;뭐든 자연스러우려고 애쓰지 말자. 그러는 동안에 나의 생각과 마음이 자연스레 무르익을 기회가 인위적으로 가지쳐짐을 잊지 말자. &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7-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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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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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7 Sep 2011 16:35:1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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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발제문</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6</link>
			<description>* 2월 5일 연구공간 L 맑스주의 세미나 발제문&lt;br /&gt;
&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a href=&quot;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attachment/cfile4.uf@1970DA4F4D4CCB661986DB.hwp&quot;&gt;&lt;img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hwp.gif&quot; alt=&quot;&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 가족사적소유국가의기원.hwp&lt;/a&gt;&lt;/div&gt;&lt;br /&gt;
&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발제문&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1. 유물론적 역사연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엥겔스에 따르면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성과들과 결부하여 모건의 연구 결과를 서술하고 그 결과들이 가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했던’ 맑스의 유지를 집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서술되고 가정되는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즉 ‘직접적 생활[삶]의 생산과 재생산이 종국적으로 역사를 규정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요인 자체는 생활수단들의 생산과 인간 자체의 생산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면 역사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발전단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이렇듯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중요한 한 축인 가족사 연구는 1877년 모건의 저작 『고대 사회』에서 제시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로 인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이전의 가설들로는 해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친족형태들의 기원을 규명하여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건의 연구가 이전까지의 신화적, 관념적 형태의 가족사 연구 방법 및 관점을 철저히 분쇄하고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기틀을 가족사 분야에 확립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모건의 연구에 기반한 원시사를 보기에 앞서, 제4판 서문을 통해 가족사 분야의 유물론적 역사연구의 정립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2. 가족사 연구의 발전 과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1860년대 초까지 가족사는 완전히 모세5경의 영향 하에 있었다. 사람들은 경전에 묘사된 가부장제적 가족형태를 가장 오래된 가족 형태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당대의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시하였다. 물론 사람들은 고대사의 몇몇 민족들과 현존하는 몇몇 야만인들이 모계혈통을 따른다든가, 오늘날에도 일정한 규모의 집단 내부에서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족들이 많다는 등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례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가족사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간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호펜은 이 책에서 ① 인간들은 처음에 그가 ‘난교’라고 부적절하게 칭한 무제한적 성교생활을 했고, ② 이러한 관계에서 혈통은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으며, ③ 그 결과 여성은 높은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여성 지배에 이르렀고, ④ 단혼으로의 이행은 태고의 종교적 계율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여자는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김으로써 이를 보상[속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주장했다. 바호펜은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을 종교적 표상의 발전 결과로 설명함으로써 신비주의적 견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난교’의 흔적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은 이미 소멸했지만 여자가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을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따라서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 단혼의 시기에도 오랫동안 여계만이 중요시되었다는 것, 어머니의 이러한 시초의 지위는 여성 일반에 대하여 그 후에는 그들이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였다는 점을 논증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천재적 신비주의자’ 바호펜의 후계자는 무미건조한 법률가 J. F. 맥레넌이었다. 맥레넌은 고대와 현대의 여러 미개 민족과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약탈혼의 형태를 발견하는데, 이러한 혼인 형태의 형성원인을 족외혼 집단과 족내혼 집단 사이의 엄격한 대립을 설정함으로써 해결한다. 즉 족외혼 부족은 다른 부족으로부터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야만 시기에 상응하는 부족 사이의 부단한 전쟁으로 인해 약탈에 의해서만 아내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대립은 실상 그 자신의 표상 가운데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멕레넌이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을 자신의 전체 이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맥레넌의 이같은 이론이 영국에서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일체의 자유로운 고찰, 따라서 일체의 결정적인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족외혼이라 불리는 것이 도처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것, 모권적 혈통제도를 본원적인 것으로 인정한 점 등의 기여를 하였지만 그의 이론의 법률가적 편협함은 이후 가족사 연구에 엄청난 해를 끼쳤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단혼으로 짜여진 맥레넌의 말쑥한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일부 민족들 사이에 일련의 남자들이 일련의 여자들을 공유하는 결혼형태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 것이다. 러복은 이러한 군혼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서 승인하였다. 그 직후인 1871년 모건은 아메리카 의 이로쿼이 족에게 특유한 친족체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등장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었다. ①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체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많은 부족들에게서도 변용된 형태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 ② 이 친족체계가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섬들에서 사멸해가고 있는 군혼의 한 형태를 통해 완벽하게 섦여된다는 것, ③ 이 섬들에는 이 결혼 형태와 나란히, 지금은 사멸한 한층 원시족인 군혼형태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 모건의 연구는 친족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었으며 훨씬 더 과거까지 인류의 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맥레넌은 모건이 말하는 친족체계 ― 이로쿼이 족에게 통용되는 결혼제도(단혼)에서 실제로 도출되는 촌수와 모순되는 친족체계. 즉 자신의 자&lt;br /&gt;
녀들 뿐 아니라 동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한편 이성 형제/자매의 자녀들은 조카, 조카딸이라고 부르는 친족체계 ― 가 사회적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지만, 모건은 1877년 자신의 저작에서 맥레넌 이론의 토대, 즉 족내혼 집단 대 족외혼 집단의 대립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인위적 가설의 잔재까지 쓸어버린다. 족외혼과 족내혼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군혼이 아직 지배하던 때에 부족은 어머니 편의 혈족에 따른 몇 개의 집단들, 즉 씨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씨족 내부에서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한 씨족의 남자들은 아내를 부족 내부에서 구할 수 없었고 반드시 자신의 씨족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 그러므로 씨족은 엄격히 족외혼을 하였지만, 이 씨족 전체를 포괄하는 부족은 족내혼을 하였다. 모건은 나아가 모권에 따라 조직된 씨족 내에서 부권에 따라 조직되는 이후의 씨족이 발전해나오는 원형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당시까지 모든 역사 서술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씨족들은, 이제 인디언 씨족들을 설명되었으며 처음으로 가족사 전체의, 원시사 전체의 윤곽을 그릴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3. 선사 시대의 문화 단계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엥겔스는 모건의 시도를 따라 인류의 선사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각각의 시기는 생활수단생산의 진보에 따라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구분된다. 이는 노동수단 및 가족의 생산과 재생산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부합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① 야만 - 기성의 자연 산물을 획득하는 시기. 인간의 가공물이 자연 산물 획득을 위한 보조 도구로 사용되는 시기.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낮은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열대, 아열대의 삼림에 거주. 열매, 견과 등을 채집. 분절 언어의 발생. 이러한 원시 상태의 실재를 증명할 만한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이러한 과도적 상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음.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중간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불을 사용해 어류를 식량으로. 기후나 장소에 상관 없이 거주 가능. 초기 석기 시대의 조잡한 석기들. 최초의 무기 사용. 수렵+채집, 식인.&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높은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활과 화살의 발명. 수렵이 정상적 노동부문의 하나가 됨. 도기 제조법은 아직.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② 미개 -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 인간활동으로 자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 이 단계부터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의 &lt;br /&gt;
자연적 조건의 차이(길들일 수 있는 동물 및 재배가능한 작물의 종류와 수)가 의미를 가지게 됨.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낮은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도기제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중간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 큰 가축 떼를 일군 아리아 인과 셈인이 여타 미개인들과 분리, 유목생활 시작, 곡물 경작은 아직. 이들이 육류와 젖을 풍부히 섭취한 것은 이 두 인종이 다른 인종을 압도하는 발전을 이룩한 원인이었을 것(동쪽 대륙)/ 인공관개, 옥수수 등 식용작물 재배, 어도비와 돌로 건축, 목조건물, 금속가공법은 알고 있었으나 철은 예외, 따라서 석기 사용(서쪽 대륙)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br /&gt;
높은 단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철광석 제련, 문자의 발명, 문헌기록(동반구에서만 독자적으로 진행). 영웅시대의 그리스 인, 로마 건설 전의 이딸리아 부족들, 바이킹 시대의 노르만 인 등. 철제 쟁기날의 사용, 농경의 시작, 인구의 급속한 증가. 호머의 서사시에 묘사된 시대.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문명 - 자연산물에 대한 더 발전된 가공 기술을 습득하는 시기.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업 및 기술의 시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4. 미개와 문명: 씨족사회의 해체와 문명의 도래의 경제적 제조건&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씨족사회의 특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야만의 중간 단계에서 발생하여 높은 단계에서 더욱 발전한 씨족은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한 개의 부족은 대개 두 개의 씨족으로 편제되어 있고 이 씨족이 인구 증가에 따라 몇 개의 딸 씨족으로 갈라진다. 부족 자체도 다시 몇 개의 부족으로 갈라지며 몇몇 경우에는 혈연관계에 있는 부족들이 모여 동맹을 이룬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상태를 완전히 만족시킨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상태에 고유한 자연성장적으로 무리를 짓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씨족은 이렇게 조직된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갈등을 조절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세계와의 갈등은 전쟁을 통해 해결된다. 전쟁은 부족의 전멸로는 끝날 수 있어도 부족의 예속으로는 끝날 수 없다.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씨족제도의 위대함과 한계가 동시에 있다. 씨족 내부에서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공적인 일의 참가, 피의 복수 등이 권리인가 의무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또한 부족이나 씨족이 여러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이 상태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씨족사회의 경제적 토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인구는 매우 희박하였다. 부족은 광대한 수렵지역에 둘러싸여 있고 다른 부족과의 경계를 이루는 중립적인 방어 삼림이 있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 성장적으로, 남녀 사이에만 있었다. 남자는 전쟁을 치르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며, 먹을 거리와 그에 필요한 도구를 조달한다. 여자는 집안일을 돌보고 음식과 옷을 만든다. 이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주인이다. 집안 살림은 몇 개의 가족들에 의해 공산주의적으로 운영된다. 공동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공동 재산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만 문명 사회의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자기 노동으로 얻은 재산”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직도 자신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최후의 법률적 구실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과 그 결과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규칙적 교환의 등장&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아시아 등지에서 길들여 번식시킬 수 있는 동물을 발견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몇몇 부족들(아리아 인, 셈 인 등)에게 가축 길들이기와 사육관리가 주요한 노동부문으로 되었다. 목축부족이 다른 미개인 집단과 분리되었다(목축과 수렵 ․ 채집의 분업). 목축 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생산하는 생활수단 또한 달랐다. 이로써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이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씨족장을 통한 부족간 교환이 이루어졌으나 가축 떼가 개별재산으로 되기 시작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이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가축은 모든 상품을 평가해주고 어디서나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요컨대 가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화폐의 기능을 획득했다.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상품 교환 발생 당초에 화폐 상품에 대한 욕구가 발전하였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농경 및 기술적 성과&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fareast-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늦어도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전야 경작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가축을 위해 곡물을 재배하였으나 얼마 안 가 사람의 식료로 곡물을 이용하였다. 경작지는 아직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후에는 세대 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를 양도받아 이용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보유권을 가질 수 있었을 따름이다. 이 단계에서 아직은 철을 얻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청동이 사용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석기를 몰아낼 수 없었다. 금과 은이 장신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노예제의 발생&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모든 부문에서 생산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씨족, 세대 공동체, 개별 가족의 각 성원에게 부과되는 노동량이 증대되었다. 이제 새로운 노동력을 들여와야만 했다. 전쟁이 이를 공급하였다. 전쟁 포로는 노예가 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노동 생산성의 상승과 재부의 증대 및 생산 분야의 확대와 더불어 당시의 전체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가져왔다. 그 결과 두 계급으로의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났다. 주인과 노예, 착취자와 피착취자.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부권제로의 이행&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가축 떼가 개별적 가장의 소유로 이행하면서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획득은 남자의 일이었고 생계수단은 언제나 남자의 소유였는데, 가축 떼가 생계를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고 가축과 교환해 얻은 일체의 것,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가 남자의 것이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지만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밖에서의 분업의 변화가 가족 내 관계를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배를 보장해 주었던 바로 그 원인, 즉 여자가 가사노동에만 종사한다는 것이 이제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보장해주었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 노동에만 갇혀있는 한 불가능하며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 여기서 이미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기 되고 여성이 가사 노동에 시간을 별로 빼앗기지 않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대 대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며, 이 대공업은 여성 노동을 대대적으로 허용할 뿐 아니라 사적인 가사 노동을 점점 더 공적인 산업으로 해소하려 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제 남자가 사실상 가정을 지배하게 됨녀서 남성 전제의 마지막 장벽이 없어졌다. 모권제의 전복, 부권제의 도입,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 그러나 이로써 낡은 씨족 제도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여 그것을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④ 제2의 거대한 분업과 그 결과&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철기의 등장과 생산력의 발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역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한 모든 원료 가운데 최후의 원료이자 가장 중요한 원료인 철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철검의 시대, 영웅의 시대의 도래. 철은 대규모의 전야 경작과 광대한 숲의 개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어떤 금속이나 돌도 당해낼 수 없는 견고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수공업자에게 제공하였다. 망루와 총구멍이 설치된 석재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부족의 중심지가 되었다(위험과 방위 필요의 증대, 건축술의 진보). 개인의 부가 급속히 증대하였다. 토지 경작과 수공업의 다양함과 기교가 더욱 더 발전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활동을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의 손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제2의 거대한 분업이 일어났다(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노예제의 확립&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생산이 증가하고 노동생산성이 끊임없이 향상되자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제 노예제가 사회 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부분이 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상품생산의 발생&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수공업과 농업의 분리로 직접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발생하였다. 이와 나란히 부족내/부족간 교환 뿐 아니라 해외 무역도 발생하였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계급분화 및 공동체의 파괴&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과 나란히 부자와 빈자의 차별이 나타났다. 가장의 재산의 차이는 낡은 공산주의적 세대 공동체를 파괴하였다. 이와 함께 세대 공동체의 책임 하에 있던 토지의 공동 경작도 소멸하였다. 완전한 사적 소유로의 이행은 일부일처제로의 이행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기 시작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씨족이 기관이 국가의 맹아로 전환&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인구가 조밀해짐에 따라 혈연 부족간 결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족들을 융합하는 것이, 이와 함께 떨어져 있는 부족 영토들을 하나의 전체 민족 영토로 융합하는 것이 벌써 필요하게 되었다. 민족의 군사 지휘자가 상설적 공직자가 되었고, 민화가 나타났다. 군사 지휘자, 평의회 등은 군사적(전쟁과 전쟁 조직이 민족 생활의 정규적인 기능이 되었기 때문)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던 씨족 사회의 기관을 이루었다. 이웃의 부는 부 획득일 제1의 목적으로 삼는 민족들의 탐욕을 자극했다. 전에는 침해에 대한 복수나 부족한 영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할 때에만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약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으며 상시적인 생업이 되었다. 전쟁의 이와 같은 상시화는 군사 지휘자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관습적으로 가족 중에 후계자를 선출하던 것이 점차 세습제로 이행되었다. 이로써 세습적 왕권과 세습적 귀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 자기의 뿌리와 점차 유리되어 전체 씨족의 대립물로 전화하였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자신들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는 부족의 조직에서 이웃을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의의 도구에서 자기 인민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자행하는 자립적 기관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시키지 않았다면, “동일한 씨족 내부에서의 재산상 차이가 씨족원들의 이해의 통일성을 그들 사이의 적대로 전화시키지”(맑스) 않았다면, 노예제 확대의 결과 자신의 노동을 통한 생계수단 획득을 노예의 일로, 따라서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⑤ 문명의 도래, 제3의 분업&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상인계급의 출현&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이리하여 우리는 이제 문명의 문턱에 도달하였다. 문명은 이 모든 기존의 분업을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강화했을 뿐 아니라 문명에 고유한 제3의 분업을 추가하였다. 즉 더 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 ― 상인 ― 이 등장하였다. 상인 계급은 생산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으면서 전체적 차원에서 생산의 지휘권을 획득하여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자신에게 예속시켰다. 생산자들에게 교환의 노고와 위험을 덜어준다는, 생산물의 판로를 원거리 시장에까지 확대시켜 준다는, 그런 이유에서 자기들이 주민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계급이라는 구실 하여, 기생자들의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은 실제로는 극히 보잘것없는 노력을 기울여 놓고서는, 그에 대한 보수로 국내외 생산의 알짜배기를 독차지하여 엄청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획득해갔다. 그런데 상인층과 함께 금속 화폐, 즉 주화가 출현했으며 이로써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을 지배할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다. 상인은 다른 모든 상품을 은폐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 이 상품 중의 상품, 화폐를 손에 넣음으로써 생산의 세계를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토지의 상품화&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분할지에 대한 개인의 점유권은 원래 씨족 또는 부족에 의해 부여된 것인데, 이 점유권이 강화되어 분할지가 개인들의 세습 재산이 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씨족 공동체의 요구권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자 토지는 무제한적 보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양도의 대상이게 되었다. 토지 소유자는 지금까지 자기와 토지를 굳게 묶어놓았던 유대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제 토지는 판매해도 좋고 저당잡혀도 좋은 상품이 되었다. 난교와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저당권이 토지 소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된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부의 집중&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상업이 확대되고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이 생겨나면서 소수계급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대중의 빈곤이 심화되었다. 신흥 부자 귀족은 옛날의 부족 귀족을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내버렸다. 자유민의 이러한 계급 분화와 나란히 노예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그들의 강제 노동이 전체 사회의 상부 구조의 기초를 이루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씨족제도의 변화&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씨족제도의 전제였던 정착생활은 상업, 토지 소유의 이전 등으로 인해 거주지의 이동과 변동이 생김에 따라 파괴되었다. 씨족 내부의 계급 분화는 씨족제도가 해결할 수 없는 이해 갈등을 만들어냈으며, 새로이 유입된 주민 대중에 대해서 씨족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단체로 대립하였다. 씨족제도는 어떠한 내부적 대립도 없는 사회에만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체적인 경제적 생활 조건들로 말미암아 자유민과 노예,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이 대립을 점점 더 극단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나타났다. 이 사회는 이 계급들 상호간의 끊임없는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만 혹은 제3의 세력의 지배 하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외견상 서로 싸우는 계급들 위에 서 있는 제3의 세력은 계급들의 공공연한 충돌을 억눌렀고 기껏해야 경제적 영역에서만, 이른바 합법적 형태로만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씨족제도는 수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분업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산물인 계급으로의 사회분열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 그것은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국가&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 대체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5. 문명사회의 총괄로서 국가의 발흥&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역사적 형태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아테네: 씨족 사회 자체에서 발전한 계급대립으로부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 폐쇄적 귀족제로 변질된 씨족 사회 바깥에 있던 평민의 승리, 씨족제도의 폐허위에서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독일: 광활한 정복 영토 지배의 직접적 결과로서(but 기존 주민과의 투쟁x+정복민/피정복민의 경제적 발전단계가 거의 비슷→변형된 씨족제도가 오랫동안 존속&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국가의 본질&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국가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로 분열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이 대립물, 즉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를 가진 계급들이 쓸데없는 투쟁으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사회 위에 있으면서 충돌을 완화시키고 ‘질서’의 틀 내에 잡아둘 권력에 대한 필요에서 국가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가는 권력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국가의 특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지역에 따른 국민의 조직&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공권력의 설립&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자기자신을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일치하지 않는 무장력. 이전에는 없었던 물적 부속물들을 갖춤(감옥 등). 국가 내부에 계급 대립이 날카로워지고 인접한 국가들이 더 강대해질수록 강화됨.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제도와 국채의 발행. 예외적인 권한을 누리는 관료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지배계급의 국가&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발생했고 이 계급 충돌 한가운데서 발생했기에 대개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며 국가는 피억압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노예소유자들의 국가로서의 고대국가, 귀족의 기관으로서의 봉건국가,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 착취의 도구로서의 현대 대의제국가) 그러나 재산상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은 아니다. 이는 국가 발전의 낮은 단계에서 그러하고 민주 공화제에서 유산계급의 권력은 간접적이지만 한층 더 확실한 방법으로 행사된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역사성&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이상에서 보았듯,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과 연결된 경제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단계로 접근해가고 있다. 계급의 발생이 불가피했듯 계급의 소멸도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사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전체 국가 기구를 그것이 응당 가야 할 곳으로 보낼 것이다: 물레, 청동 도끼와 나란히 국가를 전시할 고대 박물관으로.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6. 문명사회에 대하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분업에 따른 상품생산의 전면적 발전&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공동생산 및 공동소유가 고립적 생산 및 개별적 소유로 전환&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생산물 및 생산이 내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가진 경제법칙들에 의해 규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사회의 계급적 분열&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국가의 발생&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러한 특징을 띠는 문명은 고대 씨족 사회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문명이 그렇게 해낸 것은 문명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충동과 정욕을 발동시키고, 인간의 다른 모든 소질을 희생시키면서 그것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문명이 시작된 첫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과학의 가속적 발전과 반복적인 예술의 전성기가 문명의 태내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러한 것들이 없이는 우리 시대의 부를 남김없이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에서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은 동시에 피억압 계급, 즉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가 퇴보함을 의미한다. “부는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인민과 대립하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다&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만약 진보가 과거의 법칙이었듯이 미래의 법칙이기도 하다면, 단순히 부만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종국적 사명은 아니다...부를 유일한 궁극적 목표로 하는 역사 궤도의 종착역으로서 사회의 해체가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다...한층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그것은 고대 씨족의 자유, 평등, 우애의 ― 한층 높은 형태의 ― 부활이 될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7. 생각해볼 것들 &amp;amp; 흥미로운 부분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문명을 추동해온 것에 관하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엥겔스는 ‘문명’의 첫 날부터 지금까지 개별적 부에 대한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가설’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관점이 문명사회를 극복할 제조건의 형성과 힘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천 년에 걸친 탐욕추구 과정의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다르게 말하면, 생산력 발전의 양면 중 발전된 생산력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라는 측면만 부각된 것은 아닌지.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친족관계에 상응하는 가족형태를 추적한 모건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인 이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가족은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것은...사회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전진한다. 반대로 친족 체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가족이 시간과 함께 이룬 진보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록하며,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난 뒤에만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모건)&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그리고 정치, 법률, 종교, 철학 등의 각 체계에서도 사태는 일반적으로 이와 똑같다.”(맑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 각각의 능동적인 요소에 대한 연구가 곧 유물론적 역사 연구. 그렇다면 각각의 시기에 이 ‘능동적인 요소’들은 생산력 및 생산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는 것?&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군혼에서 대우혼으로의 변화&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원시사에서 가족 발전의 요체는 양성간의 결혼 공동체가 지배하는 범위가 처음에는 부족 전체를 포괄하는 수준이었다가 지속적으로 좁아지는 데 있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족이, 다음에는 점차 먼 친족이, 그리고 급기야는 결혼으로 인척관계가 된 친족까지 배제됨으로써 결국 어떤 종류의 군혼도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며, 종국에는 잠시 느슨하게 결합되는 한 쌍의 배우 관계[배우혼]만이 남게 된다.” 58p.&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엥겔스는 군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여기서 “근친상간을 방지하려는 충동이 몇 번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단 그것은 명확한 목적 의식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암중 모색적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건은 결과론적인 방식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씨족들 사이의 결혼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력한 종족을 만들어낸다”고 하고, 엥겔스는 이를 자연도태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미개인들이 점차 친족 간 결혼을 기피하는 ‘관념’을 가지게 된 원인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이 텍스트에서 이러한 ‘자연도태’에 대한 가설 뿐인데, 좀 더 자세하고 역사적이며 유물론적인 설명이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또한 엥겔스는 군혼으로부터 단혼으로의 이행이 본질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면서, “경제적 생활조건들이 발전할수록, 그리하여 고대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인구 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부터 내려오던 성관계가 태고의 소박한 성격을 잃게 될수록, 이 성관계는 여자들에게 더욱더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여자들은 더욱더 절실하게 정조권...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조건들과 정서의 변화가 여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굴욕감을 가지게 하였는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 밖에도 결정적인 전제나 추론에서 급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가령 67p. 가부장이 된 남성이 종래의 상속순위를 파기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모권제의 파기가 추동되었다는 설명.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④ 현대적 의미의 가족형태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이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현대의 가족은 노예제 뿐만 아니라 농노제도 맹아 형태로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농경을 위한 노력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족은 그 후 사회와 그 국가에서 광범하게 발전한 온갖 대립들을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축소판의 형태&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 내포하고 있다.”(맑스) 69p.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⑤ 일부일처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으며, 그것과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왜냐하면 결혼은 변함없이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인 자연 성장적 공동 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에 기초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그러므로 단혼은 남녀의 화해로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화해의 최고 형태로서 나타난 것은 더욱더 아니다...그것은 한 성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으로서, 그때까지 선사 시대 전체를 통해서도 나타난 적이 없던 양성 간의 항쟁의 선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의 남녀의 적대적 발전과 일치하고, 또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노예제 및 사적 부와 함께,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저 시대,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 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불행과 억압을 통해서 달성되는 그러한 시대를 열어놓았다. 단혼은 문명 사회의 세포 형태인바, 우리는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도 문명 사회 속에서 완전히 전개되는 이 대립들과 모순들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다.”76-77p.&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⑥ 프롤레타리아트와 개인적 성애&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부르주아적 결혼: 당사자의 계급적 처지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정략 결혼. 극심한 매춘으로의 변모.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애가 진정한 규칙이 되고 또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억압 계급들 사이에서뿐이다...그런데 이 계급에게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재산의 보존과 상속]도 모두 제거되어 있다...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결혼은 어원적 의미에서는 일부일처제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83p.&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성애는 그 본성상 배타적이기 때문에” 결혼의 완전한 자유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완전한 의미의 일부일처제가 실현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br /&gt;
&lt;br /&gt;&lt;/P&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6-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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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엥겔스</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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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Feb 2011 13:02: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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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어떤 날</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5</link>
			<description>&lt;P class=HStyle0&gt;&lt;br /&gt;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등록금 내라고 문자가 와 있는거야. 500만원 넘지. 1년에 천 만원 깨지는게 말이 되냐? 졸업하면 대체 빚이 얼마야...몰라 리모델링 중이니까 3월엔 들어가겠지. 아 아침부터 문자를 보내고 지랄이야 성질나게.”&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과외 하고 돌아오는 602번 버스 안에 기타를 맨 여학생이 신경질을 마구 내더니 홍대 앞에서 내렸어. 하늘은 쾌청한데 습습하게 품안을 헤집는 추위가 버스 문이 열릴 때마다 기어들어왔던 것 같아. 여학생의 이야기가 너무 선명하게 귀에 꽂혀 마음 한 쪽이 침침했지만 금새 잊고 신이 났지. 오늘은 너도 보고, 백만년 반에 공연도 보는 날이었으니까.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신나서 공연 시간표를 보며 동선을 짜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화가 왔네. 한 번 만 더하면 돈 받는 날이라, 며칠 남지 않은 네 생일에 장갑을 사줄까, 운동화를 사줄까, 생일상을 차려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그간 뭐빠지게 열심히 가르친 탓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수업을 그만 하자 하네. 지갑엔 다음 주 월요일까지 버틸 3만원 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날이 저물고, 홍대 앞 거리마다 사람들은 모여들고, 2만원으로 우리 표를 샀지. 시발, 나 졸라 멋있는거 같애. 전재산의 2/3를 공연티켓에 쓰다니. 곱고 서툰 노래가 공연장을 메우는데 내 머릿속은 온통 돈 걱정에 복잡하고, 너무 안정적으로 사는 거 같애서 죄책감 가졌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하루 아침에 현실이 시궁창같이 느껴지고. 노래는 귀로 들어갔다 여기 심장까지 이르지 못해 되튕겨 나가고. 그래서 차라리 읊조리는 노래들보다 쿵쾅쿵쾅하던 그 브라스밴드가 좋았던 거 같아. 소리가 온 몸을 채우니까 골치아픈 생각도 잠시, 사라져버렸거든.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그들이 달빛요정을 추모하는 방식은 그런거였어. 그냥 놀던 대로 노는 거. 더 신나게 노는거. 그게 왠지 좋아서, 온통 내일부터의 밥값 같은 거에 가 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애.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그런거 뭐라고 하나. 헤비메탈? 하여튼 그런 음악은 너무 건조해. 막 정전기 일어날 것처럼 건조해서 마음을 긁어 마구 긁어. 철수세미같이. 순 날티나게 생긴 한 사람이 노래를 하네. &lt;/P&gt;
&lt;P class=HStyle0&gt;‘저기 나의 친구가 가고/여기 달빛이 오네 There goes my friend/Here comes moonlight’&lt;/P&gt;
&lt;P class=HStyle0&gt;그 사람은 정말로 달빛으로 온걸까? 차갑게 식은 지하 단칸방을 나와 정말 무대에 있는걸까?&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지난 반 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함께 갔었는데, 정작 오늘이 선고일인걸 깜빡해버렸어. 이죽거리고 호통치던 판사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는 께름칙하게도 분명하지만, 난 네가 끝까지 당당하도록 옆에 있어주고 싶었는데. 이런 상 병신이 있나.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이렇게 거지같은 글을 쓰고 있는데 난 뭐 북받친다고 울컥 눈물이 나네. 알바 사이트를 뒤적거려도 당장 한 달치 생활비를 선불해줄 일거리가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엄마한테 말해버렸거든. 난 참 더럽게도 쓸모없는 인간이더라고 거기서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엄마가 통장을 하나 줘. 동생이 처음에 나 모르게 들어놨던 주택청약통장이야. 다음 과외를 소개 받아서 한 달치 소개비를 떼주고 날 때까진 버틸만큼의 돈이 들어있었어. 동생 저금통에서 500원 짜리 털 때도 이렇게 죄스럽진 않았는데. 텔레비전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있던 아빠가 갑자기 반응을 보이네. 아빠, 그냥 보던 텔레비전 계속 보시면 안될까요. 그렇게 인상 찌푸린다고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아빤 잘 모르는게 하나 있어. 이젠 내가 마음을 바꿔도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돈은 벌 수 없어. 그렇게 살면 난 죽어. 아빤 그걸 몰라.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사실 이거 별거 아니야. 사채를 끌어다 쓴 것도 아니고 청약부금 하나 깼을 뿐이야. 이런 거 이제 시작일 수도 있어. 담금질하는거야. 씩씩해져야지. 진짜 힘든 사람들이 보면 내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면서 그럴거야 “에그, 그런거 가지고 그랬쪄?”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그래도 어쨌든 눙물이 나서 엉엉 거리며 담배를 피는데 여기에 달빛요정이 있는 거 같다 느껴졌어. 전투형 달빛 요정이.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난 변태같게도 돈 떨어지고 똥줄타니까 잡생각일지언정 마구마구 생각이 돼. 글자들이 머릿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말들이 가슴에서 쿵쾅쿵쾅 난리를 쳐. 그러니까 지금을 씩씩하게 견뎌야해. 통장잔고 3,157원인데도 당장 네 생일선물 걱정하는 나를 사랑해야해.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돈 없이도 나를 살찌우는 것들, 돈 없어야 나에게 풍요롭게 생겨나는 것들 그런 거에 접속해야 해.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진짜 사는 길이야.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요런 글도 미화+궁상+척하는 글일까봐 염려되지만, 어쩌겠어 난 지금은 쏟아내야 살 것 같아. 그래야 당장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
&lt;/P&gt;
&lt;P class=HStyle0&gt;모르겠어 끝은.&lt;/P&gt;
&lt;P class=HStyle0&gt;노랫말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이 글의 끝도&lt;/P&gt;
&lt;P class=HStyle0&gt;이렇게 흔들리며 가고 있는 내 삶의 끝도&lt;/P&gt;
&lt;P class=HStyle0&gt;그런건 모르겠어. &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amp;nbsp;&lt;/P&gt;&lt;br /&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5-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lt;!--
	&lt;rdf:RDF xmlns=&quot;http://web.resource.org/cc/&quot; xmlns:dc=&quot;http://purl.org/dc/elements/1.1/&quot; xmlns:rdf=&quot;http://www.w3.org/1999/02/22-rdf-syntax-ns#&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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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Work&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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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License&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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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t;
&lt;/div&gt;
</description>
			<category>단상</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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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5#entry85comment</comments>
			<pubDate>Fri, 28 Jan 2011 12:16:37 +0900</pubDate>
		</item>
		<item>
			<title>푸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6강 발제문</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4</link>
			<description>&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a href=&quot;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attachment/cfile7.uf@191552414D27D89D1ED225.hwp&quot;&gt;&lt;img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hwp.gif&quot; alt=&quot;&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 푸꼬발제.hwp&lt;/a&gt;&lt;/div&gt;&lt;br /&gt;
&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976. 2. 11 강의 발제문&lt;br /&gt;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TABLE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MARGIN-LEFT: 0.04pt;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44.28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트로이 신화&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게르만적 가설&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골족 중심 신화&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fareast-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불랭빌리에의 텍스트&lt;/SPAN&gt;&lt;/P&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44.28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시기&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중세이래, 17c 중반&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573년~17c 초&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7c~&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7c 말~18c 초&lt;/SPAN&gt;&lt;/P&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44.28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줄거리&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to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프랑쿠스를 따라 트로이를 떠난 트로이인(프랑크족)들이 도나우강을 거쳐 라인강가에 정착, 이후 프랑스 창설.&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베아투스 레나누스&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ver.&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갈리아를 침략하여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골족&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과 싸워 이긴 것은 고향 땅 게르마니아를 떠난 게르만인 “프랑크족”. 따라서 프랑스는 정복과 승리의 권리에 의해, 동시에 게르만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합스부르크가 세계왕국에 종속되어야 함.&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프랑수아 오트만 ver.&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프랑스 왕국의 건설자는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인&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들을 물리친 게르만인. &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골족과 프랑스 국가가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의 모태. 4, 5c에 골을 침략한 프랑크족은 이 원시 골족의 후예들. 프랑크족은 깊은 노스탤지어+로마에 예속된 골을 해방시켜주려 갈리아에 온 것. but 로마화된 골에 흡수. 돌아오며 싸운 대상은 부르군디, 고트족(이교도들). 이 전사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왕이 봉토를 하사. (봉건제의 기원 설명)&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가난한 귀족에게 불리한 매관제도 비난, 귀족의 사법권 및 연관된 이득 박탈 항의, 참사원의 자리 요구, 행정감독관들의 역할 비판. 특히 왕과 왕자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행정조직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 ‘국가에 대한 국가의 정보’ 절대왕권과 이를 떠받치면서 순환적인 앎을 생산하는 행정조직 사이에 쐐기를 박고자 함. &lt;/SPAN&gt;&lt;/P&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44.28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특징&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to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와 골, 프랑크족의 침입을 완전히 삭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인=프랑크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제국 계승/로마제국과 동등한 왕국&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왕권=로마황제의 주권&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to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게르만족의 갈리아 침입, 정복 등장&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게르만=프랑크족=골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오트만ver.에서 골족이 아닌 로마인들을 물리친 것으로 변경-&amp;gt;프랑스 왕의 로마식 명령권 부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프랑크 왕국의 헌법과 기본법은 게르만 사회의 기본법(민중주권)&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to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게르만적 가설을 피해가기 위해 채택된 수단의 하나&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골⊃게르만, 훈족, 영국인, 고트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프랑크족=골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법=게르만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봉건제도의 기원을 왕의 의지로 설명&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AYOUT-GRID-MODE: char; LINE-HEIGHT: 120%&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세계왕국의 자격을 프랑스에게로 옮겨놓으려는 의도&lt;/SPAN&gt;&lt;/P&gt;&lt;/TD&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95.22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2.82pt&quot; vAlign=to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9pt; 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이하 상술&lt;/SPAN&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TABLE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MARGIN-LEFT: 0.04pt;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WIDTH: 419.54pt; 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HEIGHT: 45.8pt&quot; vAlign=center&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돋움110; mso-hansi-font-family: 윤돋움110; mso-ascii-font-family: 윤돋움110&quot;&gt;트로이 신화(중세~르네상스 시기)-종교전쟁: 게르만적 가설(프랑수아 오트만, 1573-17c초)-트로이 신화로의 복귀/급진적 골중심주의(17c말)//17c말 불랭빌리에의 텍스트들&lt;/SPAN&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 공법 학습/교과서로서의 트로이 설화&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중세 이후 통용되던 트로이 설화가 17c에 다시 복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설화가 담당했던 공법학습의 기능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법을 말하고 있는 분명한 기능적 담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로마인과 프랑크인의 기원의 공통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로마인과 프랑크인이 한 형제(프리아모스의 아들들)로부터 기원했다면, 로마가 사라진 날부터 로마제국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히 다른 형제들이다. 프랑스는 만인이 인정하는 일종의 자연권으로 로마제국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왕이 국민들에 대하여 로마 황제가 자신의 신민에게 행사한 것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왕의 주권은 로마 황제의 주권과 같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로마의 삭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그러나 프랑스가 로마의 계승국인 것은 로마와 동등한 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프랑스도 로마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이므로, 게르만의 황제들(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는 아무런 합법적인 가신관계가 없으므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품고 있던 세계왕국의 커다란 꿈에 예속될 이유가 없다. 로마가 삭제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골족의 삭제와 프랑크족 침입의 삭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골과 골족의 후예들(프랑크족)이 한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는 로마 시대의 골, 카이사르 시대의 골, 식민지 시대의 골 또한 완전히 삭제되어야 했다. 동시에 내적으로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을 단절시킨 프랑크족의 침입 또한 삭제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을 계승하면서(프랑스가 또 하나의 로마되기), 로마를 삭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합스부르크에 대한 불복종).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2. 종교전쟁&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사람들은 이 낡은 신화(왕과 권력의 계보의 계속성을 보장하는)를 뒤엎고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이 국가의 영원한 하부구조라는 주제(이후 오귀스탱 티에리가 ‘민족이원성’이라 불렀던 주제)를 처음 도입한 것이 종교전쟁이었다고 말한다. 푸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참조하는 프랑수아 오트만의 가설의 함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종교전쟁 당시의 그 어떤 저술가도 종족/민족의 이원성이 왕국을 관통하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종교의 신봉자들은 민족 내부의 이원성을 받아들이면서 종교의 단일성을 주장할 수 없었고, 종교의 선택가능성과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 안에서 두 종교의 존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통일성을 해쳐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가 통일성 가설은 종교전쟁 시기 내내 강화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3. 오트만 가설의 의의&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공법교육이 불가능하게 된 계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오트만의 가설은 침략을 통해 수많은 나라들이 사라지고 새로 생긴다는 가설이 영국에 나타나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이후 이 가설의 주변에서 모든 법률-정치적 논쟁이 한데 얽혀 나타났다. 이 근본적인 불연속성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왕과 그 권력의 계보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공법교육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공법이라는 커다란 문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계승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로 바뀌었다. 국가가 확고한 연속성으로 계승되지 않고, 탄생과 강성, 쇠락, 완전소멸의 길을 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오트만의 문제의식-왕권의 내적경계를 확정짓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오트만도 위에서 제기된 문제, 즉 한 국가 안에 이질적인 두 민족의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오트만은 역사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되살리고 싶어했던 로마식 절대권력에 대립하여 합법적 정부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오트만의 문제는 그러니까 한 백성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분리가 아니라 왕권의 내적 경계를 확정짓는 것이었다. 그가 골족과 게르만족이 형제임을 피력하는 우화를 말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오트만의 역사기술은 독일과 프랑스, 프랑크와 골의 깊은 연대를 확립함으로써 역사의 형식을 빌려 현재를 두 겹으로 분리시켰다: 오늘날의 교황과 사제들(그 옛날의 로마 침략군)-라인강 저편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그룹(과거의 해방군이자 형제나라)&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오트만 담론의 중요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왕과 국민의 상호 권리를 규정했으나 역사의 어느 순간에 잊혀지고 침해된 어떤 역사적 모델을 재발견하여, 그것을 절대왕권의 기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오트만의 담론은 매우중요하다. 16세기 이래 왕권의 제한, 즉 과거 모델의 재구축과 잊혀진 기본법을 잇는 끈이 오트만의 담론 속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원성 담론이 아니었다. 이 게르만적 가설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유래하였으나, 가톨릭이 왕권의 제한에 관심을 가지고, 절대왕권 반대로 돌아섰을 때부터 가톨릭 그룹에까지 급속도로 퍼졌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4. 게르만적 요소를 피해가려는 노력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7c 말부터 오트만 담론의 게르만적 요소를 피해가려는 작업이 착수되었다. 이것들이 공법의 원칙과 권력 행사의 측면에서, 리슐리외와 루이 14세의 유럽정책의 측면에서 왕권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창설자가 게르만이라는 이 견해를 피해가기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이 채택되었는데, 그 중 특이한 두 가지가 17c 중반에 다시 활성화된 트로이 신화로의 회귀와 급진적인 ‘골중심주의’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 골중심주의적 우화들, 설화들은 종족의 차이를 지울 뿐 아니라 게르만 법과 로마 법의 이질성도 지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게르만인들이 그들 고유의 법을 버리고 로마인들의 법률-정치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봉토나 귀족의 특권도 귀족들의 고풍스롭고 근본적인 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봉건제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권력과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던 왕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골을 모든 유럽 민족의 모태로 삼음으로써, 세계왕국의 자격을 프랑스 쪽으로 옮겨놓고자 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5. 침략, 역사, 공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침략&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7c 중반에 프랑스 왕조 창설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말했던 것과, 영국 왕조의 근원 및 창설에 대해 영국인들이 말하는 바에는 하나의 공통점과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침략의 형태와 동기, 결과가 역사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제 중요한 법률-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자연과 법, 왕권의 제한을 말하는 것은 침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왕의 참사원과 의회, 종심법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침략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귀족이 무엇이며, 왕과 왕의 참사원과 국민 앞에서 귀족의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말은 역시 침략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컨대 공법의 원칙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침략’에 대해서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역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 홉스가 자연법에서 정당한 국가를 구성하는 원칙을 찾으려 하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서는 실제로 행사되는 법의 유효성과 근원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 프랑스의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법률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이 될 역사의 한 단면에 대한 것이었다. 대강 메로빙거 왕조에서 샤를마뉴 대제에 이르는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시대가 바로 그 대상이다. 그때까지 왕의 지배권의 영속성을 수립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프랑크족과 트로이의 역사만을 이야기하던 프랑스의 역사 지평 안에 새로운 인물들(메로베, 클로비스, 샤를 마르텔, 샤를마뉴, 페팽 등), 새로운 텍스트들(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샤를마뉴의 텍스트), 새로운 문제들(샹드마르스, 5월 집회, 클로비스의 세레식, 푸아티에 전투, 샤를마뉴의 대관식, 수아송의 항아리 등)이 등장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공법&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적 풍경과 새로운 참조대상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이 새로운 자료와 공법에 관한 정치적 논의 사이에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와 공법은 나란히 진행된다. 18c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교육을 어떻게 하는가를 눈여겨본다면, 거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공법임을 발견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④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점&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군주제의 문제 주변에서 침략이라는 주제가 다시 활성화되던 시기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흡사한 새로운 역사의 장이 프랑스에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노르만족과 색슨족의 종족적 이원성과 정복이 역사의 기본적 조음절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17c 말까지 민족의 이질성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골과 트로이, 골과 게르만, 골과 로마 사이의 신화적 인척관계는 권력 승계의 연속성과 민족의 동질성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다. 그런데 17세기 말에 이 견고한 동질성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추가적이고 상이한 신화적 이론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능이나 목표나 결과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한 담론에 의해서였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6. 민족의 이원성&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민족의 이원성이라는 주제를 도입하게끔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었다. ‘적대적인 집단들간의 전쟁이 실질적으로 국가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가’, ‘정치권력이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심판관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정치권력은 전쟁의 도구나 수혜자, 불균형을 야기시키는 요소인가’를 알기 위한 문제들. 이 문제에서부터 사회체의 동질성이라는 암묵적인 주제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군주가 무엇을 알아야 할까, 그의 지식을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얻어야 할까 등의 소위 정치교육의 문제에서부터였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7. 불랭빌리에의 텍스트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비판 및 공격의 목표&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불랭빌리에를 포함하여 반동적 귀족계급과 연결된 모든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공격목표는, 17c 이래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조직을 연결하는 이 앎 권력의 메커니즘이었다. 재산을 탕진하고 부분적으로 권력 행사에서도 밀려난 귀족계급이 탈환해야 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나 직접적 권력이 아니라,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을 때에도 소홀히 했던 권력체계의 중요한 고리, 즉 왕의 앎, 왕과 귀족들이 공유하는 어떤 앎, 암암리의 법, 왕과 귀족의 상호 약속이었다. 결국 대항적인 앎 또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연구의 형태를 띤 하나의 작업이 필요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새로운 앎과 그 적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ⅰ 법률적 앎&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귀족들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앎, 앎에서 앎으로 이어지는 순환적인 앎(왕이 자신의 절대권력의 이미지만을 발견하는 앎).&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역사: 공법의 뿌리, 역사적 공정성의 근거, 법의 역사(배신, 배신에 대한 배신들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앎. 배신당하고 모욕당한 귀족들의 무기가 될 앎. 문서의 뒤에서 암호를 해독하고 폐지된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고, 사법적인 앎이 감추고 있는 분명한 적대성을 고발하는 앎.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ⅱ 행정감독관의 앎&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집무실의 앎,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는 앎, 경제적/수량적인 앎, 잠정적 부, 부담가능한 조세에 대한 앎&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 부의 역사: 실제적인 부는 왕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자행된 부도덕한 행위들의 혼합임을 보여주기 위해 부의 생산이라는 문제의 뒤로 돌아가보는 역사, 국왕의 금고가 귀족들의 소득을 삭감한 과정의 역사(부의 이동, 수탈, 빼돌리기, 빈곤화, 파산의 역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8. 새로운 앎, 새로운 역사&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제까지 역사는 권력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역사, 권력에 의한 권력의 역사였다. 이제 귀족들이 말하려고 하는 역사는, 역사적 앎의 기능 자체를 폭파시켜버릴 담론이었다. 그것은 역사기술과 권력행사 및 의식에 의한 권력 강화와 공법의 이미지화 양편의 상호연결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불랭빌리에와 함께 역사의 새로운 주제가 나타났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① 새로운 이야기 주체/주제suje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이제까지 역사의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독점해온 권력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한다. 역사를 말하는 사람이며 역사의 대상인 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이자 주제는 당시 한 역사학자가 ‘사회’라 부른 것이다. 이 때 사회는 하나의 신분에 의해 결집된 개인들의 총체, 집단, 연합 또는 고유의 관습, 풍습, 자기들만의 일정한 법칙을 가진 일정수의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민족). 민족은 국경, 한정된 권력체계, 국가가 없다. 이제부터 역사에서 문제가 되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민족들이다. 민족혁명의 개념, 종족, 계급 개념도 모두 여기에서 연원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② 새로운 형태의 앎&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역사의 새로운 주제와 함께 이제까지 완전히 무시되었던 대상들에 대한 앎이 표면에 떠올랐다. 그것은 집단간의 연합과 경쟁, 은폐되었거나 드러난 이해관계의 역사이고, 지출과 수탈, 부채, 기만, 불이행 등의 역사이다. 이 앎의 방법은 조직적으로 망각된 모든 것을 회상하고 그 악의적 의도를 판독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 안에 있던 악을 영원히 고발하는 방법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푸꼬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권력의 주변에서 어떻게 특정의 투쟁도구가 권력 안에서 권력에 대항하여 생성되는지 하는 것이었고, 그 도구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앎이었다고 말한다. 이후로 한 정치집단이 이런저런 이유로 행정군주제의 절대국가 속에서 앎과 구너력의 결합을 비난하고자 할 때마다, 이런 유형의 담론이 많은 수정과 형식의 갈등을 일으키며 널리 유포될 것이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③ 새로운 앎에 대한 포섭&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18세기에 정치적 갈등이 역사적 담론으로 표출되던 시절,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앎이 절대왕정의 행정적 앎에 대항하는 정치적 무기였을 때 왕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앎을 재식민화하려 했다. 역사를 담당하는 행정부서의 창설(1760)은, 왕국의 법적 근거를 파괴할 수도 있는 역사적 자료가 있다는 것을 왕이 처음으로 암묵적으로 시인한 것이고, 결국 왕의 커다란 양보였다. 즉 왕의 권력과 행정권 사이에 헌법이나 기본권, 인민의 대표성 같은 어떤 것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왕권의 첫 번째 양보였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절대권력에 대항하여 요긴하게 쓰려던 바로 그 자리에 이 역사적 앎을 권위주의적 형태로 다시 뿌리박는 것이기도 했다. 이 앎은 군주의 권력과 행정권의 행사 및 지식 사이에 있는 군주의 앎을 다시 소유하기 위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군주의 앎과 행정부의 지식 사이에 창설된 역사 담당부서는, 왕과 그 행정부 사이에 엄격히 통제된 방식으로 왕조의 단절 없는 전통을 수립해야 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fareas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푸꼬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또한 이 요소 안에서 민족간의 투쟁, 다시 말해 먼 훗날 인종과 계급의 투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살펴보고자 한다. &lt;br /&gt;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윤바탕110; mso-hansi-font-family: 윤바탕110; mso-ascii-font-family: 윤바탕110&quot;&gt;&lt;br /&gt;
&amp;nbsp;&lt;/P&gt;&lt;/SPAN&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4-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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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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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7 Jan 2011 21:44:0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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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외상태 3, 4장 발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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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3. 유스티티움 Iustitium&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1 유스티티움&lt;/P&gt;
&lt;P class=바탕글&gt;근대 ‘예외상태’의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음. &lt;/P&gt;
&lt;P class=바탕글&gt;법 자체의 효력정지/법률적 공백의 생산.&lt;/P&gt;
&lt;P class=바탕글&gt;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인지할 경우,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집정권, 치안관, 호민관들에게, 극단적인 경우에는 모든 시민에게 국가의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모든 수단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 원로원 권고는 로마에 동란(대외전쟁이나 봉기, 내전으로 야기된 비상상황)이 일어났음을 선언하고 통상 유스티티움 선포로 이어지도록 하는 법령에 기반해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2 테오도르 몸젠의 유스티티움 해석-『로마법 논고』 &lt;/P&gt;
&lt;P class=바탕글&gt;원로원 최종 권고와 그것의 전제인 긴급상태를 ‘정당 방위권’에 기대어 설명. &lt;/P&gt;
&lt;P class=바탕글&gt;긴급상태가 법 바깥에 있음을 수긍하면서도 이를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 원로원 최종 권고를 ‘준독재’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유스티티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오도한다. 유스티티움의 경우, 어떠한 새로운 정무관직도 창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시민이 정상적인 질서의 용어로는 정의될 수 없는, 유동적이고 이례적인 최고 명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3 아돌프 니센의 분석-『유스티티움-로마 법제사적 관점에서의 한 연구』 &lt;/P&gt;
&lt;P class=바탕글&gt;니센은 유스스티티움을 통상 ‘휴정 기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공적 추도’라는 후대의 의미와도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다. 니센에 따르면 유스티티움은 예외상태에 직면해 법률이 정무관들의 행동에 부과하고 있던 여러 제약들(특히, 로마 시민을 인민의 명령 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일의 금지)이 해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법의 정지, 법의 무효화이다. 법을 무효화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니센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스티티움이란 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 논고』에서 질서를 구하기 위해 질서를 ‘파괴하자’면서 아무런 주저함 없이 외쳤던 긴급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따라서 니센은 긴급사태를를, 원로원 최종권고, 동란의 선언과 체계적으로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동란을 전제하며, 동란은 유스티티움의 유일한 원인이다. 이것들은 공법상의 범주이며, “공법상으로 보자면 예외적인 조치들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휴지기”를 가리킨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원로원 ‘최종’ultimus 권고-최종적인 긴급사태는 그 곳을 넘어서면 되돌아오가너 구해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저편의 지대를 가리킨다. 그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는 무엇에 대해 극한적인가? 법질서에 대해. 이런 의미에서 원로원의 최종 권고와 유스티티움은 로마의 국법 질서의 경계를 표시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4 니센으로부터 도출한 유스티티움의 본질적 특징들-유스티티움≠독재&lt;/P&gt;
&lt;P class=바탕글&gt;로마 국법에서 독재관은 집정관들이 선출하는 특수한 종류의 정무관직으로, 쿠리아법을 통해 광범위한 최고 명령권을 부여받는다. 반면 유스티티움에서는 새로운 정무 기구가 창출되지 않고, ‘법률에 의해 공포됨 없이’ 무제한적인 권한을 향유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몸젠과 플라우만은 ‘준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애매함을 전혀 없애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제도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일조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근대의 예외상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예외상태와 독재를 혼동함으로써 1921년의 슈미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로시터나 프리디리히도 예외상태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오류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즉 예외상태를 법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독재라는 권위있는 전통속에 예외상태를 기입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사정이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외상태는 독재 모델에 따른 권력의 절정 상태가 아니라 법이 텅 빈 상태, 즉 법의 공백과 정지로 정의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5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진 행위의 성질&lt;/P&gt;
&lt;P class=바탕글&gt;로마 전체를 갑자기 집어삼키는 이러한 아노미적 공간은 너무나 특이해서 고대의 문헌 자체를 혼란시킨다. 리비우스는 유스티티움 상황에서 집정관들이 민간인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하고, 키케로는 스키피오 나시카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함으로써, 민간인이면서도 “마치 집정관인 것처럼” 행동했다고 적었다. 유스티티움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존립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공법과 최고명령권, 궁극적으로 법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역설적 합치는 다음의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를 드러내준다: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성질이라는 문제.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는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진 행위가 법적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든 법률적 규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만 명확해질 수 있다. 법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의 행동을 입법, 집행, 법 위반 행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유스티티움 기간에 행동하는 정무관이나 민간인은 하나의 법을 집행하거나 위반하는 것도, 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아노미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행동에 어떻게든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면-그저 법을 집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행동은 단순한 사실일 뿐, 법률적으로 절대 규정할 수 없으며, 그것의 본질을 정의하는 일은 법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6 유스티티움의 계보학적 연구 결과&lt;/P&gt;
&lt;P class=바탕글&gt;1) 예외상태는 독재가 아니라 법의 공백 공간이며, 모든 법적 규정-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 자체가-작동하지 않는 아노미 지대이다. 따라서 예외상태를 법에 직간접적으로 연결시키려 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학설은 틀렸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2) 법의 공백 공간은 몇 가지 이유들로 법질서에 매우 본질적인 것이므로, 법질서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예외상태와의 관계를 확고하게 해야만 한다. 마치 법질서가 확립되려면 반드시 아노미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 법의 효력정지와 관련해 결정적인 문제는 유스티티움 기간에 이루어져 모든 법적 규정을 벗어난 행위의 본질 문제이다. 이 행위는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절대적인 비-장소에 자리하는 듯하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xml:namespace prefix = v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vml&quot; /&gt;&lt;v:line id=_x67575888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116.14pt, 747.52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100.54pt, 738.52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v:line id=_x67596024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116.14pt, 739.72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100.54pt, 748.72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lt;v:line id=_x67598680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124.91pt, 100.41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115.31pt, 107.61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lt;v:line id=_x67607576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124.31pt, 105.21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112.31pt, 99.21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4) 법률-의-힘이라는 생각은 이런 정의 불가능성, 비-장소에 대응하는 것이다. 법률에서 분리된 법률-의-힘, 부유하는 최고 명령권, 적용 없는 효력, 일종의 법률의 영도라는 생각까지 이 모두는 법이 스스로의 부재를 자체 안에 끌어안아 예외상태를 점유하기 위한, 혹은 적어고 그것과의 관계를 확보해두기 위한 픽션들이다. 법이 아노미를 둘러싸고 전개해온 긴 싸움에서 이들 범주가 당당했던 기능을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유익하다. 이들 범주에서 중요한 것은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정의이다. 예외상태론의 본질적 임무는 예외상태가 법적 성질을 갖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외상태와 법의 관계가 갖는 의미, 장소, 양태를 정의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4. 공백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1 이런 관점에서 예외상태를 둘러싸고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읽어보자. 1925~1956년 사이에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전개된 이 논쟁과 관련해 겉으로 드러난 관련 문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문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 문서들의 맨 앞에는 벤야민의 『정치신학』독해가 아니라 벤야민의 「폭력비판론」(1921)에 대한 슈미트의 독해가 들어가야 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언제나 스캔들로 간주되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스캔들을 뒤집어 슈미트의 주권론이 벤야민의 폭력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살펴보겠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2 「폭력비판론」&lt;/P&gt;
&lt;P class=바탕글&gt;완전히 법 ‘바깥에’ 그리고 법 ‘저편에’ 자리하면서 그 자체로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의 변증법을 폭발시켜버릴 수 있는 폭력violenza의 가능성을 확증하는 것이 벤야민 에세이의 목표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폭력을 ‘순수한’, ‘신적인’ 폭력이라 불렀으며 인간의 영역에서는 ‘혁명적’ 폭력이라 불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법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 법이 위협으로 느끼지만 절대 그것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법 바깥에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런 폭력이 “그저 법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다. 벤야민의 비판은 그러한 폭력의 존립을 증명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폭력이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으로서 법 바깥에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로부터 혁명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과 또 어떤 식으로 그것이 가능한지도 증명된다. 이 혁명적 폭력은 인간에 의해 순수한 폭력이 최고의 상태로 드러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력에 고유한 본질적 특징은 법을 만들어내지도 보존하지도 않으며 단지 법을 탈정립시켜 새로운 역사시대를 연다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벤야민은 이 에세이에서 예외상태를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슈미트가 사용하는 다른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데, 결정이 그것이다. 법은 “장소와 시간에 의해 규정된 ‘결정’을 형이상학적 범주로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인정은 “모든 법적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결정 불가능하다는 데 대한 특이하고 매우 힘 빠지는 경험”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3 『정치 신학』 &lt;/P&gt;
&lt;P class=바탕글&gt;슈미트가 『정치 신학』에서 발전시킨 주권론은 여러 면에서 벤야민의 이 에세이에 대한 꼼꼼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벤야민과 반대로 슈미트는 순수하고 아노미적인 폭력을 법적 맥락 속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슈미트에게 예외상태란 순수한 폭력이라는 벤야민의 생각을 포획할 수 있는 공간이자, 아노미를 저 노모스의 총체에 기입하려 할 때 설정하는 공간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순수한 폭력, 즉 완전히 법 바깥에 있는 폭력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외상태 속에서 그런 폭력은 바로 배제를 통해 법 안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란 하나의 장치, 벤야민이 주장한 완전히 아노미적인 인간 행위에 슈미트가 응답하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두 글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하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1) 슈미트는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고 이를 결정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대체의 전략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벤야민의 비판에 대한 응수로 바라보아야 한다.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사이의 구분은 실제로 슈미트의 대립 도식과 문자 그대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주권론을 발전시킨 것은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을 벗어나 있는 순수한 폭력이라는 이처럼 새로운 형상을 무효화하기 위해서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2)『정치 신학』에서 주권 권력은 법을 만들어내거나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효력정지시키는 벤야민의 순수한 폭력에 대응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법적 문제의 궁극적 결정 불가능성이라는 벤야민의 사유에 응답하여 슈미트는 주권을 극한적 결정의 장소로 파악한다. 이 장소는 법의 외부도 내부도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한계 개념’인데, 이는 순수한 폭력을 무효화하고 아노미와 법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자 했던 슈미트의 시도에서 비롯된 필연적 귀결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3) 벤야민이 결정을 통해서는 절대로 순수한 폭력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슈미트도 어던 경우가 실제로 긴급 상황인지, 그런 경우에 어떤 조치들이 실제로 취해져야 하는지를 내용면에서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슈미트는 이를 전략적으로 뒤집어 그러한 불가능성이야말로 거꾸로 주권적 결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근거라고 주장했던 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4 『독일 비애극의 원천』-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응답&lt;/P&gt;
&lt;P class=바탕글&gt;벤야민은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정의를 인용하면서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수정을 가한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크적 주권 개념은 “예외상태를 둘러싼 논의에서 발전한 것이며, 예외상태를 ‘배제하는 것’을 군주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고 있다.”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주권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법질서 안에 포섭해서는 안된다. 그는 예외상태를 배제해야 하며, 법질서 바깥에 남겨두어야 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슈미트에게 결정이 주권과 예외상태를 결합하는 연결점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은 역설적이게도 주권자의 권력을 그것의 집행에서 분리시키며, 바로크의 주권자가 구성상 결정 불가능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배 권력과 지배 능력 사이의 대조...전제군주에게 결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주권 권력과 그것의 집행 사이의 분리는 정확히 법 규범과 법 실현 규범 사이의 분리와 일치하는데, 『독재』에서 이러한 분리는 위임 독재의 토대였다. 『정치 신학』에서 슈미트는 결정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제헌 권력과 헌법 권력 사이의 변증법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 대응했고, 다시 이에 대해 벤야민은 슈미트가 규범과 그것의 집행을 구분한 것을 끄집어내 응수한다. 항상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해야 하는 주권자는 법 전체를 분열시키는 단층이 복구 불가능하게 되는 장 그 자체인 것이다. 권력과 능력 사이에는, 또한 권력과 그것의 집행 사이에는 어떤 결정으로도 메꿀 수 없는 하나의 틈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 때문에 예외상태는 『정치 신학』에서와 달리 기적이 아니라 파국이 되기에 이른다. 바로크는 시간의 종말을 알고 있다. 이 시간의 종말은 공백일 뿐이며, 구원도 피안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내재할 따름이다. “피안에는 가장 희미한 현세의 숨결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이 비워져 있다. 바로크는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형상화를 벗어나기 십상이었던 사물들의 풍요로움&lt;/SPAN&gt;을 피안으로부터 탈취해 그것을 지상에서 강렬한 형태의 최정점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최후의 하늘을 일소하고 진공 상태가 된 이 최후의 하늘이 언젠가는 파국적인 위력을 발휘해 지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들어놓는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러한 ‘하얀 종말론’은 바로크적 예외상태를 파국으로 형상화하고 슈미트가 정치적, 신학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주권과 초월, 군주와 신 사이의 일치를 분쇄한다. 벤야민에게 주권자는 “여전히 피조물의 영역에 갇혀 있을 뿐이며 피조물의 지배자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주권자의 기능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재정의는 예외상태가 초래할 완전히 다른 상황을 함축한다. 이제 예외상태는 아노미와 법적 맥락 사이의 절합을 보증하는 문턱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오히려 아노미인지 법인지 절대로 결정할 수 없는 지대가 되며, 그러한 지대 안에서 법질서와 피조물의 영역은 하나의 동일한 파국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5 「역사철학테제」- 여덟 번째 테제&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실제적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반파쇼 투쟁에서의 우리의 입지가 향상될 것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슈미트의 관점에서 법질서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치, 즉 예외상태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의 목적은 규범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킴으로써 규범을 적용가능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가 상례까 되면 이 기계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저 여덟 번째 테제에서 정식화된 규범과 예외 사이의 결정 불가능성은 슈미트를 외통수로 모는 것이었다. 주권자의 결정은 『정치 신학』에서 부여된 임무를 더 이상 집행할 수 없다. 그런데 예외와 상례의 혼동은 제3제국에서 실제로 존재했다. 히틀러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자신의 ‘이중 국가’를 조직하려 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벤야민이 여덟 번째 테제에서 하고 있는 실제적 예외상태와 예외상태 일반 사이의 구분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슈미트는 법률로 규제되는 예외상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예외상태)를 픽션적이라고 명명했다. 벤야민은 이 두 예외 상태 사이의 대립을 슈미트에게 되묻기 위해 그 대립을 다시 한번 정식화한다. 예외와 정상상황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픽션적 예외상태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절대로 상례와 구분될 수 없는 예외상태가 실제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폭력과 법을 연결해주던 모든 픽션은 여기서 사라진다. 남는 것은 아노미 지대 뿐이며 거기서는 어떤 법률적 가면도 쓰지 않은 폭력이 지배한다. 예외상태를 통해 아노미를 붙잡아두려는 국가 권력의 시도였던 법적 픽션을 대신해 내전과 혁명적 폭력, 즉 법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행위가 들어선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6 벤야민-슈미트 논쟁의 결정적 논점&lt;/P&gt;
&lt;P class=바탕글&gt;벤야민과 슈미트 사이의 논쟁은 한쪽에게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법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다른 한쪽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한 관계를 끊고 벗어나야 하는 아노미 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지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이다. 폭력을 다시 법적 맥락에 기입하려는 슈미트의 시도에 벤야민은 폭력이 순수한 폭력으로서 항상 법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논증하는 것으로 응수하고 있는 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아노미를 둘러싼 싸움은 서양 형이상학을 규정해온 ‘존재를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만큼이나 서양의 정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정치의 궁극적 대상으로서의 순수한 폭력-정치의 고유한 대상인 순수 존재의 대응. 순수존재를 로고스의 그물망에 포섭하려는 존재[론]적, 신학적, 논리[학]적 전략에는 아노미적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를 보증해야 하는 예외의 전략이 대응하고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v:line id=_x67658136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246.34pt, 443.60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227.74pt, 435.20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lt;v:line id=_x67678224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227.74pt, 443.60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245.14pt, 434.60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따라서 법과 로고스가 생명의 세계에 가닿을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효력정지라는 아노미적(혹은 무논리[학]적)지대가 필요한 것인 양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 법은 아노미를, 언어는 비언어적인 것을 포섭해야 존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갈등은 하나의 텅 빈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아노미, 즉 법의 진공상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규정이나 실재적인 술어도 결여한 순수존재. 법에 있어 이 텅 빈 공간은 그것의 구성적 차원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이 지대-규범과 무관하게 인간이 행동하는 지대-는 법의 극한적이고 유령적인 형상과 일치하며, 거기서 법은 적용 없는 순수한 효력(법률-의-형식)과 효력 없는 순수한 적용, 즉 법률-의-힘으로 분리된다.&lt;/P&gt;
&lt;P class=바탕글&gt;법을 만들어내지도 보존하지도 않는 인간 행동인 순수한 폭력은 언젠가 포획되어 법적 맥락 속에 기입되어야 할 인간 행위의 어떤 원초적 형태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직 예외상태를 둘러싼 싸움에서 핵심적ㅇ니 문제가 되는 것으로, 바로 이 싸움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런 식으로만 법보다 앞선 것으로 전-제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4.7 순수한 폭력의 의미&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어딘가에 자체적으로 존재해 단지 보존하기만 하면 되는 순수성 따위를 전제하는 것은 오류입니다.……어떤 존재의 순수성은 결코 무조건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조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은 순수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존재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벤야민에게서 ‘순수성’은 관계적이다. 따라서 ‘순수한 폭력’의 순수성은 폭력 행위 자체에 내재하는 실체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폭력과 신화적 ․ 법적 폭력 사이의 차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 유래한다. 벤야민은 이 외부의 조건이 무엇인지 글의 첫머리에서 확실히 하고 있다. “폭력이 법 및 정의와 맺고 있는 관계”&lt;/P&gt;
&lt;P class=바탕글&gt;신화적 ․ 법적 폭력이 언제나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인 반면 순수한 폭력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주제가 나타난다. ‘순수한 수단’, 즉 ‘목적없는 수단’이라는 역설적 형상으로서의 폭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당한 목적을 식별해내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폭력은 목적에 따라 정당하거나 부당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목적들에 대해 수단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관계하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찾아내는 것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어떻게 하면 수단은 목적과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언어가 전달이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순수하고 단순한 전달 가능성이 될 때 순수하듯이 폭력 또한 하나의 목적을 향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단성과의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순수한 것이 된다 즉 오로지 폭력과 법 사이의 관계를 폭로하고 폐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법 정립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결코 법과의 고유한 관계를 폐기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법을 “필연적이고 밀접하게 폭력과 연루된” 채로 남아있는 권력의 권좌에 올려놓는 반면 순수한 폭력은 법과 폭력의 연결망을 폭로하고 절단하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치하거나 집행하는 폭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작동하고 현현하는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4.8 계급 없는 사회의 법&lt;/P&gt;
&lt;P class=바탕글&gt;“열쇠를 잃어버린 경전은 경전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도,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궁리되는 법이야말로 정의로 가는 문”이라는 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열쇠를 잃은 경전은 예외상태에서의 법에 대한 암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런 법률은 더 이상 법률이 아니라 삶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순수한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화적 ․ 법적 폭력의 폭로에는 카프카론에서 일조의 잔향으로 등장하는 이미지, 즉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궁리되는 법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이미지가 대응한다. 따라서 폭력과 권력 사이의 연결망이 절단된 후에도 여전히 가능한 법의 형상이 있다. 효력을 발휘하지도 적용되지도 않는 법이 그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v:line id=_x67696640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419.14pt, 570.72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403.54pt, 562.92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lt;v:line id=_x73667440 style=&quot;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pag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page; mso-position-horizontal: absolute&quot; to=&quot;403.54pt, 571.92pt&quot; strokeweight=&quot;0.33pt&quot; from=&quot;420.34pt, 562.92pt&quot;&gt;&lt;v:stroke&gt;&lt;/v:stroke&gt;&lt;/v:line&gt;그런 식으로 일체의 관계에서 해방된 뒤에도 살아남는 법은 어떤 것일까? 벤야민이 여기서 마주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는 원시 기독교적/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 대응한다. 메시아의 완성 이후 법은 어떻게 되는가? 계급 없는 사회에서 법은 어떻게 되는가? 벤야민은 카프카의 「신임 변호사」에 대한 독해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 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목적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행국면이나 법을 유령적 삶 속에 유지시키지만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무한한 해체과정이 아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더 이상 집행되지 않고 궁리되는 법이 정의가 아니라 단지 정의로 이끄는 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은 법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작동을 멈추게 하는 일-즉 법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법률-의-힘이 저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예외상태 속에서의 법의 이러한 유령적 형상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각자에 고유한 전략에 따라 법을 ‘궁리하고’ 법에서 활력을 빼앗고 법과 ‘놀려고’ 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언젠가 인류는 마치 어린 아이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갖고 노는 것처럼 법을 갖고 놀 것이다. 이는 법을 경전에 따라 사용하는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용에서 법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법 이후에 발견되는 것은 법에 선행하는, 보다 적절하고 원래적인 사용 가치가 아니라 법 이후에만 태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용법이다. 이러한 해방이 바로 궁리나 놀이의 임무이다. 이러한 궁리하는 놀이는 정의에 이르는 통로에 다름 아닌데, 벤야민은 정의를 세계가 절대로 전유되거나 법질서화될 수 없는 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런 세계의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a href=&quot;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attachment/cfile25.uf@201D87334D0DDF8537809B.hwp&quot;&gt;&lt;img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hwp.gif&quot; alt=&quot;&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 예외상태.hwp&lt;/a&gt;&lt;/div&gt;&lt;br /&gt;
&lt;/P&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3-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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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벤야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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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예외상태</category>
			<category>유스티티움</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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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9 Dec 2010 19:33: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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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맑스 「자유 무역 문제에 관한 연설」독서노트</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2</link>
			<description>&lt;br /&gt;

&lt;BLOCKQUOTE&gt;자유 무역은 생산력들을 증대시킵니다. 산업이 성장하면, 부, 생산력들, 한마디로 말해 생산적 자본이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면, 노동의 가격 따라서 임금 또한 증가합니다. 노동자에게 있어 가장 유리한 조건이란 자본의 성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정해야 합니다.(중략)&lt;br /&gt;
&lt;br /&gt;그러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노동자에게 있어 가장 유리한 상태인 자본이 성장할 경우에 노동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는 사멸할 것입니다. 생산적 자본의 성장은 자본의 축적과 집적을 의미합니다. 자본의 집중은 분엽의 증대와 기계 사용의 증대를 초래합니다. 분업의 증대는 노동의 특수 기능, 노동자의 특수 기능을 파괴하고, 이 특수 기능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증대시킵니다. &lt;br /&gt;
&lt;/BLOCKQUOTE&gt;&lt;br /&gt;
&lt;br /&gt;자유무역으로 인한 자본의 생산력의 증대-&amp;gt; 노동자의 파멸&lt;br /&gt;
자본의 정체, 산업의 쇠퇴-&amp;gt; 노동자의 파멸&lt;br /&gt;
&lt;br /&gt;그렇다면 둘 중 하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전체를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경제법칙들에 의해 온갖 가혹함에 의해 타격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lt;br /&gt;
&lt;br /&gt;&lt;br /&gt;

&lt;BLOCKQUOTE&gt;더 나아가 이 노동자들의 불행은 산업의 진보와는 불가분의 것이고 국민 복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복지는 노동 계급의 불행을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amp;nbsp; 보우링 씨가 죽어가는 노동자들에게 해대는 위로, 그리고 자유무역론자들이 확립해 놓은 모든 보상 학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귀착됩니다:&lt;br /&gt;
&amp;nbsp;죽어가는 수천의 노동자 여러분, 절망하지 말라. 당신들은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당신들 계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 계급의 숫자는 언제나 너무 많아서 자본은 그 일부를 죽이면서도 절멸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더욱이 만약 자본이 착취 재료인 노동자들을 재차 착취하기 위해 그들을 항상 신경써서 준비해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본이 유효한 사용법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lt;br /&gt;
&lt;/BLOCKQUOTE&gt;&lt;br /&gt;
&lt;br /&gt;&quot;노동자들의 불행은 산업의 진보와는 불가분의 것이고 국민 복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quot;&amp;nbsp; 16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개소리.&lt;br /&gt;
&lt;br /&gt;&lt;br /&gt;
&lt;br /&gt;
&lt;BLOCKQUOTE&gt;께네로부터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이 개진했던 모든 법칙들은 지금까지 상업상의 자유를 구속해 왔던 질곡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 법칙들은 자유 무역이 실현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확증됩니다. 그중 &lt;STRONG&gt;제1법칙은 경쟁이 모든 상품의 가격을 그 생산비의 최소치로 인하시킨다는 것&lt;/STRONG&gt;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의 자연가격은 임금의 최소치입니다. &lt;br /&gt;
&lt;/BLOCKQUOTE&gt;&lt;br /&gt;
&lt;br /&gt;&quot;기계 장치에서의 모든 개량의 변함없는 목적과 경향&quot;이 &quot;인간 노동의 가격을 저하시키는 것&quot;이듯이, 경쟁의 제1목적은 자본의 앵무새들이 씨부리듯이 인간능력의 개화같은 것이 아니라 &quot;모든 상품의 가격을 그 생산비의 최소치로 인하시키는 것&quot;이다. 노동력 상품도 당연히 포함해서. &lt;br /&gt;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2-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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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노트</category>
			<category>경쟁</category>
			<category>맑스</category>
			<category>자유무역</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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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1 Nov 2010 18:19: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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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맑스의 코뮌, 레닌의 코뮌</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8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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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Ⅰ 맑스의 코뮌&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1871년 3월 18일 동틀 녘, 빠리는 “꼬뮌 만세”라는 우렛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부르주아의 마음을 그토록 괴롭힌 저 스핑크스인 꼬뮌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1. “사실 제정은, 부르주아지는 국민을 지배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고 노동자 계급은 아직 이 능력을 얻지 못한 때에 유일하게 가능한 정부형태였다.” 그것은 “발생기의 시민 사회가 봉건제에서의 자신의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었으며 완전히 발전된 부르주아 사회가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의 수단으로 전환시켰던 저 국가 권력의 가장 매춘부와 같은 동시에 최종적인 권력 형태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꼬뮌은 이러한 제정의 직접적 대립물이다. 부르주아지는 루이 보나빠르뜨를 대통령으로 하는 의회제 공화국에서 지배계급 전체 이해의 조화를 담보하는 정치형태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제정’으로 전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적인 봉기에 맞선 전쟁에만 몰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자 지배의 도덕적, 법적 정당화의 보루인 의회권력을 스스로 파괴한 결과였다. 일체의 정당성과 유능함을 잃어버린 통치권, 하지만 여러 분파로 갈라진 부르주아지들의 이해관계가 유일하게 합치될 수 있었던 그 통치형태는 보나빠르뜨로 상징되는 국가권력과 사회의 ‘부패’로 자신을 보충하기만 하면 되었고, 보나빠르뜨의 쿠데타는 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따라서 제정은 ‘부르주아의 부패한 계급지배’를 온전히 대표한다. 꼬뮌은 “계급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폐지해야 하는 공화국”의 “현실적인positive 형태”로서 제정에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그러므로 꼬뮌을 구성하는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 없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2.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이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고,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이다.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로서 꼬뮌은 “생산자의 사회적 노예제의 영속화”인 계급들의 존재, 계급 지배의 존재와 병존할 수 없다. 따라서 꼬뮌은 이러한 계급의 존재 자체 및 계급 지배에 근거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하기 위한 지렛대로 봉사해야 했다.” 이는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수중에 부로 집적하는 계급 소유를 철폐하고(수탈자에 대한 수탈), 생산수단을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전화” 시킴으로써 도모되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 꼬뮌은 빠리에 존재했던 “새로운 세계”이다. 꼬뮌에서 노동자 계급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달성하고 그와 함께 현재의 사회가 자기 자신의 경제적 작용을 통해 불가항력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더욱 고차적인 형태를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오랜 투쟁을, “환경과 함께 인간을 완전히 변모시키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묵묵히 수행했다. 이들에게는 실현할 이상 같은 것은 없었으며, “붕괴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 이미 발전해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해방”시킨다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실행할 임무가 있었다.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꼬뮌이 빠리에서 이루었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제2 제정의 음탕한 빠리의 흔적은 더 이상 없었다...시체 공시장에는 더 이상 시체가 없었으며, 야간 도둑도 없었고, 절도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848년 2월의 날들 이래로 빠리의 거리는 처음으로 안전했는데,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를 흘리는 빠리는―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느라고, 식인귀들이 자신의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자신의 역사적 창의성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빠리는 모든 죽은 것들에 대립하는 새로운 세계를, 프랑스의 모든 건강함을 표현하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Ⅱ 레닌의 꼬뮌&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에게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으로 조직되어 통치함으로써만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을 억압하고 계급 지배를 폐지하여 공산주의로 갈 수 있는 물질적, 제도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 대중(러시아의 경우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지배 하에서 마침내 국가와 민주주의는 사멸한다. 레닌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맑스의 혁명사 3부작과 그 시기의 편지들에서 발견하는데, 특히 맑스가 52년까지의 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의 국가를 타도하는 것에 점점 더 역량을 집중하게 되는 것을 서술했지만, 71년 파리 꼬뮌을 겪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의 사멸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정치형태를 발견하였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레닌에 따르면 맑스는 1871년에 이르러 “국가를 타도하기 위해 무엇이 발생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레닌은 꼬뮌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있을까.&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이 파악한 파리 꼬뮌은 이렇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1. 꼬뮌은 내적 ․ 외적 조건들에 의해 ‘국가 기구 타도’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럽 대륙에서 전 인민을 격변에 몰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던 프롤레타리아-농민 동맹을 실현함으로써 나름대로 위의 목표를 수행할 수 있었다. 즉 꼬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시도된 부르조아 국가기구를 타도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2. 꼬뮌은 타도된 국가기구를 대신해서 ‘오로지’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를 실시하였다(상비군의 폐지, 선출되고 국민소환에 복종하는 관료). 그런데 “이 ‘오로지’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국가조직을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형태를 지닌 또다른 국가조직으로 방대하게 대체시켰음을 뜻한다.” 부르주아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전화한 것이다. 꼬뮌은 “타도된 국가기구를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해야 하는 ‘최종적으로 발견된’ 정치형태”였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3. 꼬뮌은 “부르조아 사회의 매판적이고 부패한 의회제도를[사실상 무정부상태를 야기하는 무능력한 의회], 의사 발표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전락되지 않는 기구로 대체했다.” “대의기구는 잔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잔존하는 대의기구는 결코 입법과 행정의 노동을 분리시키거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와 같은 특수한 체계로서의 의회는 아니다.” 여기서 레닌은 맑스가 코뮌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관리의 기능을 언급하면서, 그 관리들을 ‘모든 여타 고용주들의 노동자’에 비유한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선 코뮌의 경험이 “낡아빠진 관료기구를 일시에 때려 부수고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폐지를 가능케 할 새로운 것을 즉각 세워”나가는 것이 결코 이상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에 따르면 코뮌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은 “십장들과 재정관리인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현 상태의 인민과 더불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모습을 예시한다. 관료제를 일시에 폐지하자는 것은 순전히 관념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 행정이 우편업무와도 같이 단순하고 편리해진 오늘날에는 사회전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 십장들 및 재정 관리인들’을 고용하여 이 일을 맡김으로써 관료제의 점진적 폐지를 실행할 수 있다. 게다가 행정 기능이 이토록 단순하다면 인민 대중이 이를 익힘으로써 관료제, 나아가 국가 자체의 기능이 쓸모없어져 사멸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코뮌은 이를 몸소 보여주었다. 즉 코뮌은 일체의 이상주의적인 흔적 없이 “낡은 것을 깨치고 새롭게 태어나는 사회의 탄생과, 전자로부터 후자의 이행형태”의 체현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Ⅲ 맑스의 꼬뮌-레닌의 꼬뮌&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은 소위 맑스의 국가론을 혁명적으로 독해함으로써, 당대 러시아 대중의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과 전략, 목표를 도출하였다. 특히 레닌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꼬뮌은 그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유용한 참조점이 되었고, 레닌 또한 꼬뮌에 대한 맑스의 독해와 꼬뮌의 역사적 경험 자체로부터 혁명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투쟁하고 명확한 혁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입지점을 얻었다. 그것은 꼬뮌의 경험에 역사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맑스의 작업을, 레닌이 다시 한 번 역사적이고 혁명적으로 독해함으로써 가능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레닌의 작업은 탁월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레닌의 꼬뮌 이해와 맑스의 꼬뮌 서술에 몇 가지 차이점이 있고, 그것이 레닌의 어떤 오류 혹은 혁명의 시대적 한계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맑스도 물론 꼬뮌의 투사들이 베르사이유 정부가 무력했던 첫 일주일 동안에 베르사이유로 진격함으로써 혁명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세력을 끝장내지 못한 것이 꼬뮌의 실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포로와 비열한 질서파 신사들에게 끊임없이 베풀었던 꼬뮌의 아량과 관용에 대해서는 조금은 애매하지만 영웅적 태도의 하나로, 띠에르 정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가치관의 표현으로 보았던 것 같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레닌은 타도된 국가기구를 대체한 국가기구로서 꼬뮌이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이유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이라는 문제는 레닌이 생각하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레닌은 국가의 사멸이라는 것도, 대다수 인민대중이 소수의 억압자들을 억압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특수한 권력기관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 본다. 착취자들에 대한 억압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꼬뮌은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과 그들을 분쇄하는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꼬뮌의 전사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동안에도 빠리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포로를 풀어주었다. 꼬뮌은 베르사이유 정부가 힘을 그러모을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 결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코뮌의 통치는 10주 밖에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런데, 코뮌은 실패한 것일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맑스는 코뮌이 보여준 활력, 건강함, 창조적 힘을 예찬한다. 그런데-이런 가정이 비판에 있어서도 무력하다는 것을 알지만-코뮌이 베르사이유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코뮌 내에서 억압자들에 대한 ‘억압’에 집중하고,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분쇄, 현실적으로는 제거를 강도높게 수행했다면, 코뮌은 새로운 세계의 선구자적 면모를 담지할 수 있었을까? 질서파의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온건함과 관용이, 코뮌이 건설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가치의 일면을 드러내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려면, 코뮌의 역사적 사명, 역할에 대한 레닌과 맑스의 시각 차가 있다는 것이 먼저 입증되어야 할 것 같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위에서 간략히 언급했지만, 노동자 계급이 꼬뮌에게 요구했던 것에 대한 맑스의 서술을 옮겨보자. “노동자 계급은 꼬뮌으로부터 기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민의 포고령에 의해 도입될 기성의 유토피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달성하고 그와 함께 현재의 사회가 자기 자신의 경제적 작용을 통해 불가항력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더욱 고차적인 형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오랜 투쟁을, 즉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환경과 함께 인간을 완전히 변모시키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lt;/SPAN&gt;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실현할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붕괴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 이미 발전해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된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SPAN&gt;맑스가 꼬뮌 자체를 이상사회와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꼬뮌의 사명은 해방사회를 ‘준비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의 과정이며 “역사적 창의성”의 발현이다. 꼬뮌의 나날은 “환경과 함께 인간을 완전히 변모시키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이 꼬뮌을 공산주의로 가는 이행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고 여기거나, 꼬뮌 하에서는 기존 국가기구의 타도만 행해졌을 뿐, 새로운 사회로 가는 구성의 계기는 없었다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꼬뮌에서 행해진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속에서 레닌은, 단순해진 국가의 행정을 다수 대중이 모두 손쉽게 ‘익히는’ 과정만을 본다. 혹 레닌에게는 인간이 완전히 변모하는 일련의 과정이 국가의 통제기능을 다수 대중이 습관적으로 익히는 것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자기통치의 기술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보기에는, 낡은 사회관계의 속박을 타도하기보다 그것에 얽매이기 쉽게 만드는 위험한 과제는 아니었을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시간을 국가의 강력한 통제 기능을 다수 대중이 습득함으로써 국가의 기능을 사멸시키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맑스가 코뮌에 대해 예찬한 진정한 ‘역사적 창의성’의 발현, 인간과 환경의 전면적인 변형이 그 의미로 가지는 ‘구성적 계기’가 다소 약화되고 지배계급에 대한 ‘억압’의 과제가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워보인다. 문제는 노동자 농민 대중이 통치의 기능을 습득하기 전에 부르주아 계급이 이러한 힘(권력)을 재탈환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자유를 철저히 박탈하고, 감시해야하며 근본적으로는 이들 계급 전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 자본가들을 싸그리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인민 대중이 국가의 생산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면 계급지배는 사라질 것이다...&lt;/P&gt;
&lt;P class=바탕글&gt;“프롤레타리아 독재,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의 억압게급을 억압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피억압계급의 전위들을 지배계급으로 조직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단순한 확장으로 귀결될 수만 없다. 돈주머니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최초로 빈자와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되는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확산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기존의 억압자들과 착취자들과 자본가들의 자유에 대한 일련의 제한을 가하게 된다. 우리는 임금노예가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을 억압해야 하며 그들의 반동적인 저항을 무력으로 타파해야 한다...엥겔스는 이 점에 대해서 베벨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혔다. 즉 그는 “프롤레타리아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반대하는 무리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되자마자 동시에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 그리고 무력에 의한 억압, 즉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의 자유를 배제하는 것-이것이 곧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변화된 민주주의이다. 오로지 공산주의 사회에서, 즉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바로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그 때에 이르러서야만&lt;/SPAN&gt; ‘국가는.......존재하지 않게 되고’,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자유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된다&lt;/SPAN&gt;.’”(『국가와 혁명』, 110-111p.)&lt;/P&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은 코뮌에 대한 맑스의 서술로부터, 일체의 유토피아를 허용치 않고 오직 역사적 운동 속에서 그 새로운 정치형태를 발견하고 배우는 맑스의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태도를 읽어낸다. 레닌에 따르면, 맑스는 운동의 구체적 경험으로부터가 아닌 어떠한 모델도 미리 그리지 않는다. 그런데 레닌은, 맑스의 이러한 태도를 배우다가 정작 철저히 현실에 발딛고 있고 그 속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 역사의 창의성이 낳은 혁명적 새로움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이런 구절. 레닌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어떤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반동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것이 될 것인지, 혹은 사회주의 혁명의 맹아가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고 했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노동자-농민 대중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맑스가 이야기 한 ‘붕괴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 이미 발전해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인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시킨 노동의 사회적 성격, 인간의 유적 능력의(소외된 형태로이긴 하지만) 개화 등등 뿐 아니라 그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태 자체도, 새로운 사회의 요소인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a href=&quot;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attachment/cfile4.uf@1919CF0F4CCBBD45283F92.hwp&quot;&gt;&lt;img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hwp.gif&quot; alt=&quot;&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 프랑스내전.hwp&lt;/a&gt;&lt;/div&gt;&lt;/P&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1-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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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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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프랑스 내전</category>
			<category>프롤레타리아 독재</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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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0 Oct 2010 15:38:1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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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br /&gt;
&lt;FONT color=#801fbf&gt;* 이 글은 연구공간 L 『지젝이 만난 레닌』세미나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음.&lt;/FONT&gt;&lt;br /&gt;
&lt;br /&gt;&lt;br /&gt;
우리가 만나야 할 레닌&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1917년의 레닌에 대해 글을 쓰려고 책을 덮고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자니 혁명이 임박할수록 더 단호하고 급박해지던 글의 인상만 남고, 책을 펼쳐 글을 참조하자니 강경하고 진지하고 생생한 레닌의 문면에 빠져 글을 쓸 생각을 아예 잊게 된다. 눈앞에 견고하게 놓여있는 텍스트에 갇히면 자구를 외워 전달하는 글 밖에는 쓸 수가 없고, 텍스트를 떠나 머릿속에 남은 인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는 독서 감상문 이상이 되기 힘들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런데 내가 한 문단 쓰고 서너 시간을 뜸 들이며 주저하다 못하고 있는 이것이, 레닌이 자신의 힘의 최대치를 보여준 바로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앞의 견고한 현실(텍스트가 되겠다)에 갇히지 않으면서 거기에 발 딛고, 그것을 넘어서지만 현실 자체를 통째로 바꾸면서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 레닌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우리를 비관(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음, 현실의 견고한 벽을 돌파할 방안을 발명할 수 없음에서 따라나오는 것)으로 이끄는 ‘죽은 현실’이 아니라 혁명의 기운으로 생동하고 부단히 움직이는 ‘현실’에 주목하고, 그러한 힘의 현실화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실천의 지평을 여는 ‘결정’을 내리는 것. 1917년의 레닌은 자신의 온 지성과 열정을 바쳐 고조되는 세계 혁명의 기운에 바로 이러한 구체적이고 유효한 결정들로 응답한 혁명가로 우리 앞에 서 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러한 레닌과 만나는 방법에 대해 이 책의 옮긴이가 좋은 조언을 해주고 있다. 옮긴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자문하고 나서 “그런 내용을 빚어낸, 어떤 면에서는 생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발상”과 생각하는 방법이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덧붙여 이후에 레닌의 텍스트가 끼친 영향이나 흐름을 봤을 때, 레닌의 생각의 결과보다는 생각하는 방법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더 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맞는 말이다. 90여년이 지난 지금, 레닌이 내놓은 구체적 선전 선동 전략과 혁명전술을 매개삼아 레닌과 만나려 한다면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레닌으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이다. 게다가 17년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강렬한 인상과 마음의 움직임은 결코 “은행 국유화”, “전 인민의 무장” 같은 레닌의 생각의 결과물(사실 이것도 그 때 그 때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전술이기 때문에, 이걸 교조처럼 받들고 따르는 것은 정말 ‘레닌주의적’이지 않다. 실질적인 권력이 잠시 반혁명 세력에게 넘어갔을 때, ‘소비에트에게 모든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말이다)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장이라도 혁명의 급박함에 몸을 던져야 할 것 같고,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난 대중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역사가 눈을 부릅뜨고 행동을 종용하는 것 같은 기운을 불어넣는 레닌의 글 이면에 자리잡은 사유의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는, 앞서 레닌의 특이점을 ‘결정’에 두었으므로, 레닌의 ‘결정들’을 이루는 특이성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레닌과 잘 만날 수 있는 길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사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지나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 그 때 그 때 레닌이 내린 결정이 가지는 역사적 적합성과 유효성은 레닌의 현실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레닌은 ‘사실은 완강하다’는 영국 속담을 즐겨쓰는데, 이때의 ‘사실’은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의 위선적인 태도를 폭로하거나 자본가들과의 평화적 타협에 내심 기대를 거는 겁쟁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에도, 그리고 혁명적 행동에 당장 나설 것을 촉구할 때에도 레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그런데 레닌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실’은 현재의 정태적인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우선 (1) 철저하게 계급적이고 혁명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파악한 사실이고, (2) 혁명의 힘의 향방을 가늠케 하는 사실이며, (3) 그 특이성의 총체에서 도출한 ‘결정’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될 수 있게 해주는 밑바탕이 되는 사실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1)의 근거: 레닌은 2월 혁명에서 차르 체제가 무너진 것, 전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집단들이 보여준 이합집산을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이나 역사에 기적은 없다.” 또한 소농민들의 동요의 원인을 쁘띠부르주아지의 계급적 특성에서 찾으며 당시의 역사적 상황 전체(즉 제국주의 전쟁)를 계급 간 내전으로 전화할 계기로 사고한다. 또 하나, 레닌이 직접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평가하는 관점에 대해 언급한 글을 보자. “상황은 그런 방식,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전개되어 나간다.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가, 혁명에 참여한 사회세력들의 힘을 침착하게 평가하는 정치가, 현재의 모든 특이 사항들을 볼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동기까지 보는 관점,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러시아와 세계 전체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더 깊은 이해관계까지 보는 관점&lt;/SPAN&gt;에서 “현재의 상황”을 평가하는 정치가의 눈에는 그렇게, 오직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강조는 인용자) &lt;/P&gt;
&lt;P class=바탕글&gt;(2)의 근거: 레닌이 ‘사실’을 언급할 때, 그것은 표면에 드러난 행태나 양태이기보다 그것이 보여주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함축하는 힘의 방향이다. 예컨대 10월 혁명을 목전에 두고 대다수 대중의 지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거나 제헌 의회, 소비에트 회의를 기다리자고 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혁명의 실패를 염려한 진중하고 우호적인 제안인 것 같지만 실은 진실을 대면하기 두려워하고 다수 대중의 자기통치와 독립 앞에 공포를 느끼는, 반혁명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책동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제안을 하는 사람들의 의중과 상관없이 그것이 가지는 현실적 효과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효과를 낳는 것은 그 제안이 함축하고 있는 힘의 방향이 반혁명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과반수 대중의 지지가 없음을 우려하는 볼셰비키 당원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거나 전국에서 볼셰비키당이 정확하게 절반 더하기 한 표를 받았다는 보장을 미리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원하며,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혁명의 현실적 상황&lt;/SPAN&gt;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보장을 해준 적이 없으며, 어떤 혁명도 그런 보장은 해줄 수 없다.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청중을 조롱하는 것이며, 자신이 현실로부터 도피한 것을 감추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현실&lt;/SPAN&gt;은 7월 이후 인민 다수가 빠르게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강조는 인용자) 볼셰비키가 절반 더하기 한 표를 차지하지 못하였음은 레닌이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다. 레닌의 ‘현실’은 인민의 다수가 볼셰비키 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것’(그러한 운동, 힘의 방향)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러한 방식으로 파악한 사실에 따르면, 오직 프롤레타리아와 빈농 대중만이 당면한 경제적 파국과 전쟁을 막을 수 있으며(이를 부정하는 모든 견해는 진실에 대한 왜곡이다), 이 모든 자본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끝장낼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이를 부정하는 모든 견해는 부르주아의 개로 전락해가고 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사실’은, 다수 대중이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기 시작했으며 혁명의 무기인 혁명적 조직도 바로 여기, 즉 소비에트로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레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지금 당장 혁명에 나서는 것.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완강하다’는 말은 ‘사실은 혁명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마지막으로 레닌이 거듭 강조하는 ‘사실’에 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 어쩌면 이것은 지금껏 이야기 된 ‘사실’의 의미들을 한 데 수렴하면서 레닌의 ‘결정’을 특징짓는 가장 독특한 지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혁명적 관점에서 힘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가늠한 바인 이 사실이, 우리의 ‘결정’으로 인해 새로 구축될 수 있는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에게 겁을 집어먹으면, 모든 대상과 현상에서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우선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운동 기준 대신 인상주의적이고 지성주의적 기준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국제적 배경에서 나라 전체의 계급투쟁과 사태의 발전을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분위기에 대한 주관적 인상을 제시한다. 물론 그들은 특히 첨예한 혁명적 순간에는 &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당의 확고한 노선, 그 불굴의 결의 역시 분위기를 만드는 요인&lt;/SPAN&gt;이라는 점을 “편리하게도” 잊어버린다.” 혁명적 기운의 고조는 중요하다. 하지만 ‘당’은 그 기세를 살펴 거기에 올라타거나, 그 위에서 이리저리 그것들을 조작하는 것만으로는 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 혁명적 기운의 안에서 그것을 결정적 행동으로까지 추동할 수 있는 계기, 결정적인 사실을 만드는 것이 이 때의 당이 해야 할 일이다. 레닌의 ‘결정’은 바로 이러한 계기, 새로운 사실을 구축하는 것에서 탁월한 힘을 발휘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혁명적 인민(왼쪽으로 움직인 대중)&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실제로 눈앞에 닥친 혁명의 문턱에서 동요하는 동료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할 때에 드러나듯이, 레닌은 부르주아적 타협에 대한 낙관주의, 그리고 이것과 맞짝인 프롤레타리아의 힘에 대한 비관주의를 매우 경계한다. 반대로 말하면 레닌이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그렇게 단호하고 강경하게 행동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데는, 혁명적 인민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계획’도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혁명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때, 즉 다수 대중이 볼셰비키보다는 멘셰비키에게 사회 개혁의 기대를 걸고 있을 때에도 레닌은 소수파로써 볼셰비키가 대중들에게 ‘진실’을 폭로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의 위선을 깨닫기만 한다면...이라는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이후 임시정부의 농민봉기 탄압 등으로 인해 대중들은 자연히 하지만 철저하게 이를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농민 독재가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방어전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상정할 때에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와 빈자들의 봉기와 연대를 믿었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정말 사랑인 것 같다)으로부터 혁명에 대한 치열함과 과단성이 따라나오고, 그러한 레닌의 치열함과 결단력으로부터 대중에 대한 믿음이 실현될 수 있는 힘이 혁명에 보태어진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혁명의 시간&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이 책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던 문장들 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이다. “지금 우리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혁명의 성패가 2, 3일간의 전투에 달려 있다.” 어찌 보면 몇 번의 승패에 혁명의 역사 전체가 좌우되거나, 하루 이틀 사이에 이 세상이 뒤바뀐다는 것은 거짓일 수도 있다. 그래, 그렇다..하지만 이것도 너무 일반론적인 이야기이다... 역사에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은 분명 있다. 어느 때의 2, 3일이 인류 역사의 몇 십 년, 몇 백 년에 맞먹는 새로움을 창조하고 낡은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그런 날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때’의 힘을 감지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귀한 능력이다. 수없이 죽어간 혁명가들, 다중들과 더불어 레닌 또한 그러한 힘을 가졌고 또 발휘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팽팽히 당겨진 활 시위를 정확히 조준하여 적확한 때에 놓을 줄 아는 것, 레닌에게 ‘결정’이란 그러한 것이었기에 ‘중간은 있을 수 없’는 ‘때마침’의 행위였을 것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다중 안의 레닌&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정말로 문턱에 닿지 않은 듯 보이는 때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부의 적들을 비판하고, 과감하게 결정하며, 단호하게 구체적인 전략의 실행을 주장하였다. 앞서 살펴본, 레닌의 “결정”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더라도 혁명적 실천을 행하려는 모든 존재들이 익히고 자신의 힘으로 삼아야 할 점들일 것이다. 하지만 레닌의 결정들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과 특징들, 그러니까 목적과 타도할 적, 그리고 진실이 단일하다는 전제 위에서만 따라나올 수 있는 신속함과 단호함(중간은 없다는 의미에서의 단호함)은 그 전제들의 토대인 세계의 사회적 관계가 레닌의 시대와 비할 수 없이 변화한 지금,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중심의 ‘자리’로서 장악할 독점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권력의 존재형태가 네트워크의 형상을 취하는 이때에),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황을 가정한다해도 단일하고 보편적인 전략을 그토록 신속하게 내놓을 수 있을까? 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혁명적일 수 있을까? &lt;/P&gt;
&lt;P class=바탕글&gt;진공을 찢고 또 채우며 나아가는 ‘결정’은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오히려 어느 때 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른다. 주체들 하나하나의(잠시 개별적으로 호명해도 좋다면) 삶의 ‘결정’이 혁명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삶정치의 시대에 말이다. 다중 안의 레닌을 상상하는 것, 혁명적 대중-오늘날의 다중을 사랑하고, 긍정하고, 믿으면서 세계의 ‘사실들’을 운동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에 기반하여 이 다음 순간의 진공을 열어나갈 혁명적 ‘결정’을 끊임없이 궁구하고 실천하는 것.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짜 레닌을 아주 잘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레닌을 통해 드러난 현실화의 힘, 혁명을 제도화하는 힘을 다중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모든 과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우리의 삶에 남아있다. &lt;br /&gt;
&lt;/P&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a href=&quot;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attachment/cfile30.uf@132B5D044CC25AAC2EFAFC.hwp&quot;&gt;&lt;img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blog/image/extension/hwp.gif&quot; alt=&quot;&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 우리가만나야할레닌.hwp&lt;/a&gt;&lt;/div&gt;&lt;br /&gt;
&lt;br /&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80-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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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단상</category>
			<category>1917년</category>
			<category>결정</category>
			<category>레닌</category>
			<category>지젝</category>
			<category>혁명</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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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3 Oct 2010 12:47:3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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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념의 공통성</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78</link>
			<description>&lt;br /&gt;

&lt;BLOCKQUOTE&gt;개별적으로는 비이성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집단적으로는 이성에 복종하겠다고 결단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바로 앞에서 인용한 원문의 괄호 친 구절이 시사하듯이[&quot;정신 나간 자로 보일까봐 아무도 감히 이를 노골적으로 위반하지는 못한다&quot; 신학정치론 16장] 그런 결단을 내리도록 그들을 강제하는 것은 그들이 함께 모여서 토의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따라서 사람들을 이성에 복종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이성적인 욕망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정념적인 명예의 야망이거나 이 야망의 부정적 이면, 곧 수치에 대한 공포이다. 하지만 결과만은 사실상 이성에 부합하는데, 이는 &lt;STRONG&gt;야망이 이성이어서가 아니라 공통적이기 때문이다&lt;/STRONG&gt;. &lt;br /&gt;
&lt;/BLOCKQUOTE&gt;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442p.&lt;br /&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lt;img id=&quot;ccl-icon-78-0&quot; class=&quot;entry-ccl-by&quot; src=&quot;http://i1.daumcdn.net/cfs.tistory/v/0/static/admin/editor/ccl_black01.png&quot; alt=&quot;저작자 표시&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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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독서노트</category>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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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2 Jul 2010 16:26:47 +0900</pubDate>
		</item>
		<item>
			<title>The history of the Congreso Nacional Indigena</title>
			<link>http://alittlepetalfallenlater.tistory.com/77</link>
			<description>&lt;DL&gt;
&lt;DT&gt;&lt;FONT color=#ff8b16&gt;출처: &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index-cba.html&quot;&gt;&lt;FONT color=#ff8b16&g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index-cba.html&lt;/FONT&gt;&lt;/A&gt;&lt;/FON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239.html&quot;&gt;&lt;FONT color=#663300&gt;&lt;br /&gt;
&lt;br /&gt;&lt;br /&gt;
&lt;FONT color=#f3d756&gt;Declaration from the Mountain of Guerrero&lt;/FONT&gt;&lt;/FONT&gt;&lt;/A&gt; 
&lt;DD&gt;Convencion Nacional Indigena (CNI), 25 December 1994. Having reunited during the 16,17,18th of December of 1994 in the ancient territories of the People of the Rain, the People of the Heart of the Mountain, and the People of the Tiger in Tlapa, Guerrero the Indigenous Pueblos and Organizations of Mexico have spoken our Word. The struggle of our brothers in Chiapas. Autonomy constitutes one of our principal rights. Constitutional recognition. Struggle within a comprehensive process of Mexican national democratization. Women delegates. The indigenous movement at the global level. 
&lt;DD&gt;&amp;nbsp;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242.html&quot;&gt;&lt;FONT color=#b8d63d&gt;The Declaration of San Cristobal&lt;/FONT&gt;&lt;/A&gt;&lt;FONT color=#b8d63d&gt; &lt;/FONT&gt;
&lt;DD&gt;National Congress of Indigenous Peoples, 10 and 11 January 1998. The Continuation Committee extension of the National Congress of Indigenous Peoples (NCIP), which met from the 10th to the 12th of January in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elaborated the following Political Declaration right after the recent incidents that aggravated the situation of indigenous peoples of Chiapas, and it was affirmed that indigenous peoples from other regions of Mexico are suffering the same situation. 
&lt;DD&gt;&amp;nbsp;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240.html&quot;&gt;&lt;FONT color=#9d8cea&gt;Netwarriors—March &#039;98 CNI Report&lt;/FONT&gt;&lt;/A&gt;&lt;FONT color=#9d8cea&gt; &lt;/FONT&gt;
&lt;DD&gt;From the National Indigenous Congress, 13 March 1998. We are still waiting for our rights to be recognized. A relationship based on the principles of plurality, sustainability, integrity, participation, and free determination declared in San Andres Sacam Ch&#039;en de los Pobres, but the response of the Mexican government has been one of military harassment and repression against our people.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241.html&quot;&gt;&lt;FONT color=#663300&gt;&lt;br /&gt;
Indigenous Peoples Congress Statement&lt;/FONT&gt;&lt;/A&gt; 
&lt;DD&gt;Nuevo Amanecer Press, 12 October 1998. The Second National Indigenous Congress. We assume the historic task, the comprehensive rebuilding of our Indigenous Peoples. By affirming our identity, we affirm that of everyone; that of those who wish to build a large house where all of us who are all fit. We ratify that the San Andres Accords are our word, of which the essence is the constitutional reform proposed by the Cocopa; the constitutional recognition of our full collective rights will be the central focus of our struggles and concerns.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243.html&quot;&gt;&lt;br /&gt;
&lt;FONT color=#ec9c2c&gt;Preliminary Report on Results from Indigenous National Congress&lt;/FONT&gt;&lt;/A&gt;&lt;FONT color=#ec9c2c&gt; &lt;/FONT&gt;
&lt;DD&gt;Nurío, Michoacán, 2, 3 and 4 March 2001. The Third Indigenous National Congress was attended 3,300 indigenous delegates officially sent by their communities, representing 42 of the 56 ethnic groups in Mexico. The assembly demanded the recognition of indigenous rights in the Mexican constitution, in the form written by the Cocopa (Concord and Peace Commission). Vicente Fox’s Plan Panamá-Puebla and the proposed superhighway on the Isthmus of Tehuantepec in Oaxaca and Veracruz. Demilitarization and release of all indigenous political prisoners.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xxx.html&quot;&gt;&lt;/A&gt;
&lt;DD&gt;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xxx.html&quot;&gt;&lt;/A&gt;
&lt;DD&gt;
&lt;DT&gt;&lt;A href=&quot;http://www.hartford-hwp.com/archives/41/0xx.html&quot;&gt;&lt;/A&gt;
&lt;DD&gt;&lt;/DD&gt;&lt;/DL&gt;&lt;div class=&quot;entry-ccl&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right; margin-bottom: 10px&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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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순덕한 호랭이</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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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8 Jun 2010 14:46:5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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