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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상을 바꾸는 블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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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We all want to change the world</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17 Aug 2011 06:50:5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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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상을 바꾸는 블로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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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6. 문명</title>
			<link>http://cimio.net/757</link>
			<description>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에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이러한 흐름이 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민족주의로 발전하면서 민족은 인간 통일성의 매우 중요한 단위로 자리 잡습니다. 이처럼 민족개념이 발전하면서 부족과 문명의 통일성은 약화하였습니다. 민족주의가 자라기 이전, 서유럽인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과 함께 유럽이라는 단위를 중요시했습니다. 중세의 서유럽은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고, 기독교를 믿고, 라틴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쓰는(실생활은 다른 언어를 썼지만) 지역이었습니다. 이러한 공통된 문화의 중요성에 비하자면, 민족의 문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죠.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싹트자 각 민족이 고유의 언어를 학문과 행정의 언어로 쓰게 되었고, 기독교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교단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렇게 서유럽 문명은 민족의 개념에 밀려나면서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결국 민족과 민족이 명예와 실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집니다. 최근에 유럽이 유럽 연합을 통해 민족의 개념을 억누르고 문명의 개념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발전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과거의 교훈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quot;역사를 연구할 때 더 나눌 수 없는 단위&quot;로서 사회(society)라는 개념을 내놓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탈리아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다른 유럽국의 역사도 이해해야 합니다. 중세 때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에 점령당했으니 이러한 과정은 스페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고, 19세기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것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권력을 쥐게 된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150년 전에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그 당시 유럽에 불던 민족주의의 물결을 이해해야겠죠. 이처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국가나 민족이라는 단위로는 부족하고, 역사의 무대가 되는 더 커다란 단위가 필요하다고 토인비는 주장했습니다. 그 단위가 바로 사회이고, 우리가 많이 쓰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문명(civiliza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한국 역사에 적용해 보자면, 한국의 역사도 동아시아 역사라는 배경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는 시기와 당나라가 송나라로 바뀌는 시기와 비슷하고,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시기가 원나라가 명나라고 바뀌는 시기와 비슷하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한 나라의 정치적 흐름을 뛰어넘는 지역적 변화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각 지역을 묶는 역사의 단위인 문명은 민족주의가 강하던 시절엔 거의 잊힌 개념이었습니다. 특히 이념 대결의 시대이던 냉전기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라 할지라도 이념이 다르면 아주 다른 세계인 양 인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한국의 옆 나라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중국은 죽의 장막에 가려진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나라였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미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지만, 심리적으론 매우 가까운 나라였죠.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 이념의 차이라는 장벽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점차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 과거에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았던 나라들을 묶는 &quot;문명&quot;이라는 개념을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미국에서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하면서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quot;문명의 충돌&quot;(Clash of Civilizations) 이론은 이념의 지배가 사라진 세계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로 떠오르게 됩니다. 헌팅턴 교수는 이제 세계가 문명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세력으로 재편되고, 이러한 세력 간의 갈등이 앞으로 국제관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리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9/11 사태는 앞으로 다가올 갈등의 시작에 불과하겠죠.&lt;br /&gt;
&lt;br /&gt;문명 중심의 국제관계는 문명 간의 갈등을 낳을 뿐 아니라, 문명 내에서 인기 있는 문화가 주변 국가로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대중문화는 지금 일본과 중국 등에서 큰 인기를 얻는 중입니다. 이는 나이지리아의 영화가 아프리카에서 인기를 끌거나, 이집트의 영화가 아랍권에서 인기를 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문명 내에서 대중문화의 주도권을 쥐는 현상의 일부분입니다. 같은 문명권에 사는 사람은 서로의 문화를 즐기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문명권에서 온 문화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대중음악이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고, 중국의 음식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는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고, 대부분 문화는 자국이나 주변국까지만 전파될 수 있을 뿐, 문명의 벽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음식인 스파게티만 해도 서양에선 일상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지만, 비서양국가에선 여전히 특별한 때만 먹는 음식일 뿐입니다. 지금 한국엔 &quot;우리 문화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져야 한다.&quot; 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물론 한국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문화상품을 만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러한 예가 전세계적으로 흔치 않다는 사실을 볼 때 이루기 어려운 목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아시아 문명에 뿌리를 둔 한국 문화가 동아시아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문명이 중요한 단위라는 사실을 깨닫는사람은 같은 문명권에서 거두는 성공을 귀중하게 여길 것입니다.&lt;br /&gt;
&lt;br /&gt;P.S. 요즘 글이 많이 늦어서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살다가 이탈리아로 옮겨오게 되는 바람에 좀 바빴고, 게다가 중간에 다시 독일을 방문하는 일까지 생겨서 좀 정신이 없었네요. 이탈리아는 얼마전 통일 150주년을 맞아 곳곳에 국기가 보이는 좀 들뜬 분위기입니다. 저는 6월에 독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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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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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imio.net/757#entry757comment</comments>
			<pubDate>Tue, 29 Mar 2011 23:56:2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5. 민족/국가</title>
			<link>http://cimio.net/756</link>
			<description>우리는 흔히 &quot;민족과 국가&quot;라는 말을 쓰지만, 엄밀히 말해 민족과 국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민족은 언어, 문화, 역사, 그리고 유전자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국가는 하나의 정부가 다스리는 정치적 단위입니다. 따라서 과거엔 하나의 민족이 여러 국가를 이루고 살거나, 하나의 국가에 여러 민족이 속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은 원래 연관이 없지만, 둘 사이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크기입니다. 국가는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어느 정도 크기를 갖추어야 하고, 따라서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스위스 정도가 최소의 크기입니다. 민족도 어느 정도 크기가 되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나 부족에 흡수되기 때문에 민족으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럽에는 삼천만 명에서 오천만 명 규모의 민족이 많은데, 이는 국가를 구성하기에 적합한 크기입니다. 물론 교통, 통신 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행정조직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엔 민족을 단위로 통치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민족 단위의 국가가 적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경제가 급격하게 발달하고, 이는 곧 새로운 행정조직을 창조하면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치조직인 민족국가(nation-state)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lt;br /&gt;
&lt;br /&gt;민족국가의 개념은 곧 민족주의와 연결이 됩니다. 유럽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는 19세기에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특히,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되었던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보다 이 개념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미 16세기에 민족국가 건설에 성공한 일본은 민족주의의 열기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원했고, 곧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게 됩니다. 민족국가의 전통이 천 년이 넘은 조선은 유교의 관점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보게 되었고, 이는 곧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독립신문, 독립문 등으로 표현)으로 발전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한족의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만주족이 이끄는 정부에 반발하게 되고, 이는 곧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lt;br /&gt;
&lt;br /&gt;유럽의 민족주의는 이처럼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아프리카에선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엔 부족은 많았지만, 민족이라고 부를만한 집단은 적었고, 따라서 민족주의가 발달할 여건이 안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은 인구가 천만 명이 넘으니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라는 넓은 지역에 다른 부족과 섞인 채 흩어져 살기 때문에 이들이 민족의식을 키워 독립국을 건설할 상황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민족의식을 형성할 여건이 안되는 가운데 식민지배가 끝나고, 아프리카는 지도에 그은 선을 따라 국가가 들어섭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탄생한 국가 안엔 수많은 부족이 존재하고, 이들은 국가라는 통일성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부족과 갈등이 발생하면 바로 내전으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lt;br /&gt;
&lt;br /&gt;민족의식의 결여는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법을 어겼을 땐 처벌을 받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활동이 위축돼서 경제가 발전하기 어렵죠.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같은 부족끼리는 서로 형제, 자매 대하듯 하지만, 부족이 다르면 서로 신뢰하지 않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거래하길 꺼립니다. 만약 다른 부족 사람과 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다면, 정부와 경찰도 결국 부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죠(실제로 최근에 벌어진 리비아 사태를 봐도, 카다피는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카다파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처럼 부족을 넘어서는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못하기에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모두가 가난을 못 벗어나는 것이 아프리카가 가난한 원인의 하나입니다.&lt;br /&gt;
&lt;br /&gt;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랜 한국에서 한 민족이 한 국가를 형성하고 산다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세상의 어느 국가도 한 민족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국가엔 외국인이 있고, 이들이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DNA와 문화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봐도 과거에 중국,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서 정착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한국인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예가 많죠. &quot;단일민족&quot;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례를 모두 &quot;예외&quot;로 처리해야 가능한 주장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특히, 최근엔 한국인의 10% 이상이 외국인과 결혼하면서 &quot;우리는 단일민족이다.&quot;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죠. &lt;br /&gt;
&lt;br /&gt;한 국가에 이민자가 늘면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무너지는 모습은 이미 유럽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독일은 게르만족만의 국가가 아니라 게르만족과 터키인들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의 국가라고 할 수 있죠. 이처럼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나고, 다민족이 한 국가에 모여 사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국가를 더 중요시할 것인지, 아니면 민족을 더 중요시할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사는 아랍인이 &quot;영국&quot;을 중요시하는지, 또는 &quot;아랍&quot;을 중요시하는지에 따라 이라크에 주둔한 영국군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겠죠. 그렇다면 국가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합성을 강조하겠지만, 국가보단 우리 민족이 중요하다는 민족 지도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와 민족 개념의 충돌은 21세기에 중요한 사회 긴장의 원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20세기와 더불어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죠.&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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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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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1 Mar 2011 04:16:4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4. 부족</title>
			<link>http://cimio.net/755</link>
			<description>오늘날, 사람들은 나, 가족, 그리고 민족을 중요한 통일성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가족은 나와 유전자의 연관성, 또는 특별한 사회적 계약으로 묶인 존재이고, 민족은 나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하지만, 과거엔 가족과 민족 사이에 두 가지 단계가 더 있었는데,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마을, 그리고 부족이 그것입니다. 지난번엔 마을을 살펴보았고, 이번엔 부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lt;br /&gt;
&lt;br /&gt;부족은 민족의 하위개념으로, 같은 민족이지만 특별히 나와 연관성이 있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부족은 민족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데, 민족이 보통 천만 명 이상이라면 부족은 보통 백만 명 이하입니다.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부족이라는 개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민족보다 부족이 훨씬 중요합니다. &lt;br /&gt;
&lt;br /&gt;우리는 &quot;왜 부족이라는 개념이 필요한가?&quot;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통,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엔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나와 완벽하게 언어적, 문화적으로 같은 사람들의 모임인 부족이 훨씬 중요한 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봐도 삼국시대 전까지 한반도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 동쪽의 동예, 북쪽의 옥저 등 다양한 부족국가가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부족국가는 교통, 통신, 행정의 발달과 더불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정리되었고, 결국은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족국가가 민족국가로 발전하는 상황은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중세 유럽엔 수많은 부족국가가 존재하였지만, 근대에 이르러 부족국가가 통합되고 민족국가가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왕국은 동쪽의 부르공디, 남쪽의 나바르의 일부 등을 흡수해서 통일국가를 건설합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색슨족, 반달족, 고트족 등 수 많은 부족으로 나누어진 민족이고, 이러한 부족주의 전통은 바이에른, 슈바벤, 프로이센 등 지역별로 다양한 문화와 사투리가 발달하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독일에도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결국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여행하려면 일곱 번 국경을 통과해야 했던 시대가 끝나고, 독일을 하나의 정부가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부족주의 전통은 뿌리가 워낙 깊고, 오늘날에도 정치체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정부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quot;연방정부&quot;(Bundesregierung)입니다. 즉, 권력을 가진 각 지역이 연합한 국가라는 개념이죠. 실제로 일부 국제회의에는 독일 각 지역 정부가 마치 독립국인 양 대표단을 파견하는 일도 있습니다(이는 스코틀랜드가 국제 축구 대회에 별도로 팀을 내 보내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이탈리아는 상황이 더 복잡해서, 중세시대엔 남쪽의 두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 중부엔 교황이 통치하는 교황령, 나머지 지역엔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했고, 이는 각 지역이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지니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도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가리발디의 주도로 불가능할 것 같던 민족국가 건설이 실현됩니다. 이처럼 힘겹게 이룬 통일국가지만, 오늘날에도 이탈리아를 남부와 북부로 나누자는 북부 연합(Lega Nord)가 북부지역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지역 간의 불화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lt;br /&gt;
&lt;br /&gt;이처럼 근대에 들어오면서 대부분 유럽국가는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힘썼는데, 이러한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합은 60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도 두 나라는 두 정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8세기에 정치적 통합을 통해 Kingdom of Great Britain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치적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잉글랜드 사람들과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베리아 반도와 브리튼 섬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이 실패한 것은 두 개의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두 민족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지니기에 통합을 하려면 한 민족이 일방적으로 흡수당해 정체성을 잃어야 하는데(이는 바로 20세기 초에 일본이 조선에서 시도하던 일이죠), 언어와 문화를 잃는 쪽에선 당연히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한 민족 안에 여러 부족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 통합이 훨씬 수월합니다. 또한, 부족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이질적인 민족에게 흡수당할 때 거세게 저항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큰 민족이 작은 부족을 흡수하는 경우는 많습니다(물론, 스페인의 바스크족처럼 작은 부족이 큰 민족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을 추구하는 예가 있긴 합니다).&lt;br /&gt;
&lt;br /&gt;한국은 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래되었기에 부족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도 수면 밑으로 부족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quot;지역감정&quot;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고 보면 부족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역이란 별 의미가 없는 개념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quot;어느 지역 사람하고는 혼인하지 않는다.&quot; &quot;어느 지역 사람은 상대하면 안 된다.&quot;는 식으로 지역에 근거하여 사람을 차별합니다. 이는 다른 지역 사람은 나와는 문화와 정체성이 다르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발견하는 부족주의의 또 다른 예로는 조선족, 탈북자 등에 대한 차별입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같은 민족은 모두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귀중한 존재지만, 부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와 민족이 같아도 나와 완전히 같은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상관없는 타인일 뿐이죠. 이러한 타인에게 거리감을 두고,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따라서 한국인들은 이론적으론 민족을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받아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부족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에서 지역감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현실에서 거의 쓰지 않는 부족의 개념을 부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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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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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8 Feb 2011 23:22:2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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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3. 마을</title>
			<link>http://cimio.net/754</link>
			<description>교통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걸어서 하루에 다닐만한 지역을 생활 반경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폴리스(polis)라고 불렀는데,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중요한 삶의 단위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quot;인간은 폴리스적인(politikos) 동물이다.&quot;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폴리스가 인간 본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친밀했고 서로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quot;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quot; &quot;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났다.&quot; &quot;이웃사촌이다.&quot;라는 말들은 지역 공동체가 중요하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lt;br /&gt;
&lt;br /&gt;과거의 지역 공동체가 이처럼 가까웠던 원인은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운명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함께 농사를 지었고, 함께 종교활동을 했고, 함께 오락을 즐겼고, 결혼 관계로 함께 묶였습니다.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이들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거나, 함께 피난을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서로 가족처럼 느낀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죠.&lt;br /&gt;
&lt;br /&gt;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하루에 수십km를 쉽게 이동하게 되었고, 생활 반경이 도시 범위로 넓어지면서 지역공동체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저 우연히 이웃과 한 동네에 모여 살게 되었지, 이웃과 생활을 같이 할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같은 조기 축구회에서 활동해서 알고 지내는 이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처럼 나와 연관된 이웃은 같은 단지에 사는 수천 명 중 극히 적은 숫자고, 아침마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은 대부분 전혀 다른 곳으로 출근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행정적으로 &quot;XX구&quot; &quot;XX동&quot;으로 묶어 놓아봤자 이들이 지역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lt;br /&gt;
&lt;br /&gt;물론 이러한 지역 공동체의 해체는 교통, 통신의 발달 및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가 없는 사회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던 시절에 대한 대단한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페이스북 게임 FarmVille이나 아이폰용 게임 Smurf Village처럼 과거의 지역 공동체를 재현하는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화폐(local currency)를 도입하거나, 차를 타고 먼 지역에서 온 상품이 아닌, 우리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역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amp;nbsp;이처럼 현실(특히 도시의 현실)에서 거의 사라진 지역 공동체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인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quot;전 세계 인구의 20%는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이고 1%는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quot;라고 말하면 단순한 사실로 받아들이겠지만, &quot;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고, 한 명은 굶어서 죽기 직전이다.&quot;라고 말하면 마음에 와 닿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역 공동체의 수준에서 생각할 때 훨씬 더 절실하게 느끼는 법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가르치며 &quot;네 이웃을 사랑하라.&quot;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quot;네 이웃을 사랑하라.&quot;라는 표현은 &quot;온 인류를 사랑하라.&quot;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지만, 훨씬 호소력이 큽니다. 지구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quot;지구촌&quot;(Global villag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지역 공동체의 개념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예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지역 공동체에 대한 애착은 심리학적으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를 던바의 숫자(Dunbar&#039;s number)라고 부릅니다. 이 숫자는 100명일 수도 있고 200명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150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50명이라면 대충 내가 작은 마을에 살면서 이웃사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비슷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나와 친한 150명이 도시 곳곳, 또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소수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지역 공동체, 즉 마을은 &quot;내가 개인적으로 친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단위&quot;이자 &quot;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quot;이었고,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죠. &lt;br /&gt;
&lt;br /&gt;이처럼 의미 있는 공동체가 사라진 도시에 사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통일성의 중요한 한 단위가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다른 단위인 개인이나 가족에게 집중하고, 이는 이기주의, 또는 가족 이기주의로 표현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동체, 또는 직접 만날 수 있는 동아리 모임 등을 통해 과거의 지역 공동체에서 느끼던 소속감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공동체도 과거의 지역 공동체와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완벽한 재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지역 공동체는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이기에 그만큼 매력적이고, 잠깐이라도 이와 비슷한 모임을 만난다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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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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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6 Jan 2011 23:47: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2. 가족</title>
			<link>http://cimio.net/753</link>
			<description>&lt;br /&gt;
&lt;br /&gt;
가족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위입니다. 가족은 보통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데, 부부관계는 사회적 계약으로 연결되고, 부모 자녀 관계는 유전자의 유사성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구성된 가족을 핵가족(nuclear family)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로 서양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모델입니다.&lt;br /&gt;
&lt;br /&gt;
사회적 계약이라는 인위적 장치로 연결되는 부부관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존재합니다. &quot;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다.&quot;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별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혼하고 나면 사회적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체 부부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이혼하는 선진국에는 부부관계의 청산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부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관계에 사회적 계약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기는 &quot;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quot; (창 2:24)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이는 부부관계가 하늘로부터 온 절대적인 관계라는 뜻이죠.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옛날 인간은 요즘 인간 둘을 합쳐 놓은 커다란 존재였습니다. 이 인간들은 힘이 셌기에 신에 대항하였고, 제우스신은 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으로 쪼개 놓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크기와 형태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죠. 이렇게 반으로 쪼개진 인간은 여전히 과거의 온전한 상태가 그리워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고, 결국 그 반쪽을 찾았을 때 다시 온전함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현실을 뛰어넘는 &quot;운명&quot;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이처럼 운명에 기반을 둔다면, 사랑으로 결혼하는 부부도 단지 사회적 계약이 아닌 운명적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quot;부부가 될 사람은 빨간 실로 엮여 있다.&quot;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부부관계를 운명의 관점에서 본 예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가족의 또 다른 축인 부모 자녀관계는 부부관계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기 원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손을 낳고,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낳을 때 가능하죠. 물론 이러한 &quot;유전자 영생&quot;이라는 목표는 자손을 낳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손을 잘 돌볼 때 가능합니다. 만약 자손을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병들어 죽거나, 좋을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못하겠죠. 따라서,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려는 본성을 타고나기 마련입니다. &lt;br /&gt;
&lt;br /&gt;
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문화에 따라 자녀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많이 다릅니다. 유럽에서도 라틴계 부모가 게르만계 부모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 표현에 훨씬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자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는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녀와 가까운 곳에 사는 풍습인데, 실제로 이탈리아 남성의 대부분은 결혼하고도 부모와 가까이 삽니다(My Big Fat Greek Wedding에서도 그리스계 아버지가 딸에게 집을 사줬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집 바로 옆집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국도 과거에 모든 결혼한 아들이 부모와 함께 대가정을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많은 부모는 자녀와 같이 살거나, 최소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에 비해 영미계, 게르만계에서는 자녀가 성장하고 나면 부모가 자발적으로 자녀와 거리를 둡니다. 시트콤 사인펠드에서도 조지 코스탄자의 부모가 조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이 나오고, 새라 제시카 파커와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Failure to Launch)라는 영화에는 성인이 되고도 집을 떠나지 아들이 독립하도록 부모가 여자를 고용해 아들을 유혹하도록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quot;손주 봐주기가 싫어서 자녀를 멀리하려는&quot; 노부모들이 늘었다는데, 이는 성인이 된 자녀와 거리를 두기 원하는 심리라는 점에서 영미, 또는 게르만계 부모들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약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지나치다면 자녀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강한 성인이 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혼동해서 자녀의 인생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마련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자녀가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가정을 공생 가정(Symbiotic family)이라고 불렀고, 이를 비생산적인 가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자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기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겠죠. 이러한 부모 밑에 사는 자녀는 자신이 부모의 삶까지 성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죠.&lt;br /&gt;
&lt;br /&gt;
가족은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의 결합일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족과 함께 할 때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죠. 문제는, 이렇게 내게 소중한 가족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조건 가족의 이익을 위한다면 이는 가족 이기주의가 되고, 무조건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면 매정한 사람이 되겠죠. 또한,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개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가족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가족만 돌본다면 프롬이 말한 비생산적인 공생적 가족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수준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공동체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를 생각해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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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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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3 Jan 2011 22:59: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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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연재]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1. 개인</title>
			<link>http://cimio.net/752</link>
			<description>영어로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quot;나눌 수 없다.&quot;라는 뜻의 라틴어(in + dividere)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개인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명의 사람을 칼로 두 쪽 낸다면, 이는 두 명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되겠죠. 따라서 개인은 인간의 가장 작은 단위이고, 고유의 통일성을 지니기 마련입니다.&lt;br /&gt;
&lt;br /&gt;이렇게 더 나눌 수 없는 개인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우선, 개인의 몸은 하나지만, 이 하나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세포는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백혈구를 보면 마치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백혈구의 독립성은 인간의 몸 전체의 안녕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합니다. 이는 다른 세포도 마찬가지죠. 즉, 개인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는 개인이라는 유기체의 안녕과 자손의 증식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뇌세포든 피부세포든 각 세포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할 뿐, 다른 목표를 지니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가 수정란 속에 든 한 쌍의 유전자에서 나왔고, 결국 이 유전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수정란은 분화를 거듭하며 결국 거대한 인간의 몸이 형성되지만, 이러한 인간의 몸은 자신의 DNA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기 원하는 &quot;이기적인 유전자&quot;의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작은 부분일 뿐이죠.&lt;br /&gt;
&lt;br /&gt;물론 이는 인간의 몸이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고, 실제로는 하나의 몸속에 다른 목표를 지닌 세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죠. 암세포는 다른 세포와 다르게 유기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암이 발생하면 인간의 몸은 통일성을 잃고 정상세포와 암세포 사이에 싸움이 진행되게 됩니다. 만약 정상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통일성을 되찾아 건강하여지고, 암세포가 이긴다면 몸은 죽게 됩니다(암세포는 주변의 세포를 암세포 화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목표가 없으므로 암세포가 이긴다고 새로운 건강한 생명체가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즉, 암은 주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죠).&lt;br /&gt;
&lt;br /&gt;이처럼 몸이 암세포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듯, 영혼도 경쟁자의 등장으로 통일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융 심리학은 인간의 영혼의 핵심을 자아(ego)라고 봅니다. 자아가 영혼의 핵심인 것은 자아에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libido)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자아가 아닌 다른 실체가 등장해 심리적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그 경험을 중심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즉, 정상적인 사람(자아가 중심인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세상을 보는 것이죠. 이처럼 자아와 경쟁하는 심리적 실체를 융은 콤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콤플렉스는 잠복해 있다가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겉으로 표현됩니다(예를 들어, 열등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지만, 남이 자신에게 던지는 농담을 듣게 된다면 열등감의 시각에서 이 농담을 해석하고 화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콤플렉스가 심해진다면 자아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콤플렉스가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경이 된다면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겠죠. 한 영혼에 여러 중심이 존재하는 정신분열이나 다중인격도 영혼이 통일성을 상실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마지막으로, 개인의 삶에서 영혼과 육체 간의 통일성이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고 한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혼이 원하는 바와 육체가 원하는 바가 다를 수가 있고, 이는 영혼과 육체 사이의 통일성을 깨트립니다. 일반적으로 육체는 적절한 영양공급, 수면, 휴식 등을 원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이러한 육체의 욕구를 무시한 채 사람들의 존경, 성취감, 금전적 보상 등을 얻고자 육체를 혹사할 수 있습니다. 잠을 안 자고, 식사도 거르면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일 중독자들이 그러한 예죠. 이는 육체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결국 영혼과 육체 모두 병들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육체가 쾌락에 탐닉하기 위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도덕적인 행위로 큰돈을 벌어 이를 방탕하게 사는 데 쓴다면 그의 영혼은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그가 정직하게 살기 원하지만, 그의 육체는 쾌락에 길들어져 있기에 부정직하게 버는 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는 결국 육체와 영혼의 부조화를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죠.&lt;br /&gt;
&lt;br /&gt;이렇게 본다면 개인의 통일성도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잘 돌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다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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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4 Jan 2011 21:22:0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멘토의 의미</title>
			<link>http://cimio.net/751</link>
			<description>다음은 월간 &amp;lt;새가정&amp;gt;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lt;br /&gt;
&lt;br /&gt;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는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입니다. 이타카의 왕이었던 그는 다른 그리스의 장수들과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후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던 여행은 10년이나 걸리고, 그의 집안은 그의 아내를 차지하려고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풍지박산이 날 위기에 처합니다. 이처럼 곤경에 처한 오디세우스와 그의 가정을 불쌍히 여긴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Mentor)로 변신하고 나타나 오디세우스의 아들이 오디세우스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quot;멘토&quot;라는 명칭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것입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멘토라는 이름은 역사가 깊지만, 막상 멘토라는 개념이 주목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멘토는 조언이 필요한 젊은이, 즉, 멘티(mentee)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삶과 업무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인생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멘토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멘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관계와는 다릅니다. 멘토는 아버지처럼 도덕적 권위를 지니지만 가족은 아닙니다. 멘토는 때로 교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시된다는 점에서 학습지도가 중요한 임무인 교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또한, 멘토는 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충고를 한다는 점에서 직장 상사와도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멘토는 조언을 통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재정과 영향력으로 도움을 주는 후견인과도 다릅니다. 멘토는 삶의 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할 모형(role model)과 비슷하지만, 일방적인 존경심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할 모형과 다르게 멘토 관계를 맺으려면 상호 동의가 필요합니다. 멘토와 멘티는 자발적으로 연결된 친밀한 관계이기에 친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로에게 조언하는 관계인 친구와 다르게 멘토 관계에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도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마지막으로, 멘토는 고민거리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꾸준히 만나는 관계라는 점에서 상담가와도 구별됩니다. &lt;br /&gt;
&lt;br /&gt;이렇게 엄밀히 멘토의 기준을 적용하자면 진정한 멘토의 개념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에 나오는 오비완 케노비는 젊은 제다이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멘토보다는 전통적인 스승의 모습에 가깝고,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매과이어 교수는 윌 헌팅에게 멘토처럼 조언을 하지만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조언자라고 볼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은 멘토 관계보다는 친구 관계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이 굳이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나오는 멘토의 이름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특정한 영역의 교육을 담당하지는 않았기에 스승은 아니고,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친구였고, 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니 직장 상사도 아니었으며, 평등한 관계가 아니니 친구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역사상 &quot;멘토&quot;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바로 오디세이에 나오는 &quot;멘토&quot;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최근 들어 멘토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전파된 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교육은 늘 친밀한 인간관계에 기초하였습니다.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스승을 찾아가 자기를 소개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후 학문을 배웠고, 스승도 배우려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며 그를 가르칠지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교육이 인격적 관계에 기초하던 시절, 스승은 정보전달자이자 인생의 조언자였고, 따라서 스승 이외에 멘토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제도가 되면서, 가르쳐야 하는 임무를 띤 교사와 배워야 하는 임무를 띈 학생이 만나는 학교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는 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되었고, 교사가 인격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자는 아니지만 인격적으로 인생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멘토는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죠.&lt;br /&gt;
&lt;br /&gt;멘토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또 다른 원인은 오늘날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려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일단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사회의 일원이 되어 관습에 따라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가능성을 보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선배로서 인생의 지혜를 나눠줄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멘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은 멘토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인 멘토 관계는 멘티에게 뿐 아니라 멘토에게도 유익한 법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에게 유익한 멘토관계의 예를 보여줍니다. 프로이트와 융이 만났을 때 프로이트는 원숙한 심리학자였고 칼 융은 그보다 스무 살이 어린 젊은 의사였지만, 둘은 나이를 뛰어넘어 심리학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가까운 관계로 발전합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토론을 벌였고, 서로의 꿈을 분석했으며,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융이 프로이트로부터 배웠을 뿐 아니라 프로이트도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융이 개발했지만 나중엔 프로이트도 자주 사용한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융이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끼친 좋은 예죠.&lt;br /&gt;
&lt;br /&gt;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멘토를 통해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죠. 물론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이라면 언젠가 자신도 좋은 멘토가 되어 젊은이들을 지도해 줘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대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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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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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7 Dec 2010 06:55: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경제와 도덕</title>
			<link>http://cimio.net/750</link>
			<description>지난 며칠간 인터넷에선 롯데마트의 &quot;통큰치킨&quot;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통큰치킨은 롯데마트에서 판매하는 닭튀김인데, 일반 치킨 제품보다 양은 많으면서 가격은 절반 밖에 안 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롯데마트가 이러한 제품을 내놓으면 다른 치킨집의 영업에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실제로 최근 10여 년간 직장인들은 &quot;잘리면 치킨집 차리겠다.&quot;는 말을 쉽게 할 정도로 치킨집은 경험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의 대표였는데, 대기업이 물량공세로 나오면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람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소비자들도 싼값에 치킨을 즐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도 언젠가 치킨집을 차려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을 생각할 때, 마냥 통큰치킨이 맛있게만 느껴질 수는 없겠죠.&lt;br /&gt;
&lt;br /&gt;결국, 롯데마트의 통큰치킨 판매중단으로 통큰치킨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정도 끝이 났지만, 이번 사태는 이마트 피자를 둘러싼 논쟁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마트 피자는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피자로, 크기는 엄청나게 크지만, 가격은 저렴해서 많은 관심을 끈 제품입니다. 이마트피자가 화제를 일으키면서 이 제품 때문에 동네 피자집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비판을 접한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은 &quot;님이 걱정하는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quot; &quot;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quot;라며 &quot;싸게 공급하는 제품을 선택하면 되지, 이를 이념의 문제, 사회의 문제로 확대하면 안된다.&quot;라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러한 정용진 부회장의 발언은 지금 대형 마트들이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통해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 시장까지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두둔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대형 마트의 동네 상권 진출은 기존의 슈퍼마켓에 커다란 위협이지만, 엄밀히 말해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없기에 불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대형 마트는 &quot;기업 경영의 자유&quot;를 강조하며 지역 소매 시장에 진출하려고 하고, 기존의 슈퍼마켓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형 마트의 &quot;탐욕&quot;을 비난하며 이를 막으려고 하는 중입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대형 마트의 영업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뒤에는 &quot;경제활동이 도덕적인가?&quot;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면 모든 경제활동은 도덕의 잣대로 평가해야 마땅하고,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경제활동을 할 때는 도덕을 무시해도 괜찮기 때문이죠.&lt;br /&gt;
&lt;br /&gt;전통적인 사회에서 경제활동은 늘 도덕의 영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quot;공정한 가격&quot;(just price)이라는 개념을 통해 각 상품은 가치에 따른 공정한 가격을 지니고, 따라서 어떤 제품을 공정한 가격보다 높게 판다면 이는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동양에서도 팔 매(賣)자엔 선비 사(士)자를 넣는 등 경제활동을 할 때 도덕을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상도덕이라는 말의 존재도 이러한 관점의 표현이죠. 하지만,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제품의 가격이 급격하게 변동하면서 전통적인 경제관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선 밀 1파운드가 은화 하나라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경제가 복잡해진 오늘날 23인치 모니터의 가격이 얼마이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처럼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제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quot;우리는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착한 마음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을 수 있다.&quot;라고 말했습니다. 즉, 경제활동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보자면 비난받아야 마땅할 행동도 경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면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많은 문제를 낳았습니다. 우선, 경제를 도덕의 영역에서 분리하자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도 쉽게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즉,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에서(또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한에서) 모든 활동이 허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영리한 사람만 이득을 보고 사회 전체로는 손해를 보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경제가 발달하던 70-80년대에 수많은 사람은 부동산 투기에 나섰고,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보자면 집값이 지나치게 올라서 대부분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돈 번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부동산 투기 전력이 있는 사람이 공직에 출마하면 &quot;저런 사람이 어떻게 공직자가 될 수 있느냐&quot;며 비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경제의 탈도덕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경제를 다시 도덕과 연관하려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도덕적 의미를 고려해 소비한다는 윤리적 소비주의(Ethical consumerism)가 좋은 예죠 (한겨레가 쓰는 &quot;착한 경제&quot;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따르면 물건을 살 때도 제일 싼 제품을 살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생산자가 생계를 유지하기에 적절한 가격을 지급한 원료로 만든 Fair trade제품을 사야 합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커피숍에서 Fair trade 커피나 초콜렛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경제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경제에 지나치게 도덕적인 관점을 도입한다면 경제가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격의 결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이 인기가 많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이 제품을 비싸게 판매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생산에 뛰어들면서 가격이 내려갑니다. 즉, 사회적 필요가 큰 제품에 자원이 모여들면서 결국 싼 값에 제품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기능을 도덕이 대체한다면,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오르면 이를 &quot;상인들의 탐욕이 가격을 올린다.&quot;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고(실제로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quot;수요가 많다고 가격을 올리는 상인은 도둑질하는 셈이다.&quot;라고 가르쳤습니다), 생산자들은 비난이 두려워서, 또는 정부의 가격 규제 때문에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생산에 참여할 의욕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는 많은데 생산은 적은 상태가 지속하고, 이는 제품의 품귀현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원유가가 올랐는데 가격을 통제해 주유소마다 휘발유가 동났던 오일쇼크 당시의 미국이 그러한 예죠. 더 흔한 경우는 도덕적 비난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가격 통제에도 가격이 오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면서 몇몇 생필품의 가격을 특별히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정부가 관리하는 품목의 가격은 일반 물가보다 더 많이 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관점과 시장의 기능은 상충하기 때문에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lt;br /&gt;
&lt;br /&gt;그럼에도, 시장을 도덕과 무관한 영역으로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히, 시장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시장의 활동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인간의 삶은 대부분 도덕과 무관하다는 말이 되고, 이는 인간의 본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시장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경제적 강자가 경제적 약자를 핍박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져, 강대국은 약소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사회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되고 말겠죠. 이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이 아니라,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의 역사적 현실입니다.&lt;br /&gt;
&lt;br /&gt;경제를 지나치게 도덕과 연관한다면 경제는 활력을 잃고 경제 발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반대로, 경제를 도덕에서 완전히 분리한다면 인간성의 파괴와 구조적 불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안에 따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해야 합니다. 통큰치킨 사태만 해도 단순한 상황 같지만 실제로는 &quot;싼값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경제적 시각&quot;과 &quot;가난한 소시민이 대기업의 위협이 없이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도덕적 권리&quot;가 부딪치면서 많은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쨌든 이번 사태는 경제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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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경제</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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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imio.net/750#entry750comment</comments>
			<pubDate>Wed, 15 Dec 2010 18:46:22 +0900</pubDate>
		</item>
		<item>
			<title>햇볕정책은 실패하였는가?</title>
			<link>http://cimio.net/749</link>
			<description>지금 한반도는 북한의 무력도발로 말미암아 긴장감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연례적인 남한의 군사훈련을 핑계로 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은 한국전쟁 이후로 최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고, 이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일단 북한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지만, 곧이어 남측에 호전적인 용어로 &quot;침략을 좌시하지 않겠다.&quot;라고 위협하는 등, 긴장 상태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고 보입니다.&lt;br /&gt;
&lt;br /&gt;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많은 사람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온건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한과 대립하기보다는 북한이 살 길을 마련해 줌으로 북한을 바꾸자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된 3대 세습이나 이번 연평도 공격에서 북한은 여전히 독재국가이며, 언제 다시 남한을 공격할지 모르는 반이성적인 국가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0년간 북한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바뀐 것이 없으니 햇볕정책에 대한 실망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죠.&lt;br /&gt;
&lt;br /&gt;하지만,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햇볕정책이 나쁜 정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우선, 햇볕정책은 북한의 실체를 정확히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외투를 벗기 싫어하는 나그네를 햇볕의 온기로 벗게 했다는 우화에서 따왔습니다. 이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quot;변해야 하지만, 변하기 싫어하는 존재&quot;로 본다는 뜻이죠. 북한을 바꾸려는 이유는, 북한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피해가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만성적인 전쟁의 공포는 무의식적으로 남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 기업의 주가가 외국의 비슷한 규모의 회사보다 훨씬 낮은 &quot;코리아 디스카운트&quot;라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게다가 북한이 이대로 가다가 어느 순간 북한 정부 붕괴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남한 몫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북한을 바꿔서 남한과 대치관계를 끝내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서도록 하는 편이 북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훨씬 유리하죠.&lt;br /&gt;
&lt;br /&gt;이처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죠. 이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등을 통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핫라인을 개설함으로 혹시 모르는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노무현 정부 말기에 이르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아졌고, 이에 따라 주가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2000선을 가뿐히 넘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후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하게 됩니다. 금강산에서 일어난 관광객 피격사건을 기점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개성공단도 위축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한 수많은 조치와 협의문은 대부분 폐지되거나 무효가 되었습니다. 핫라인은 끊어져 위기의 순간 남북이 직접 접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리하게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무언가 위태하게 보이는 상황이고, 이번 연평도 도발도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물론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quot;햇볕정책으로 북한은 남한을 얕보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이 남한을 공격했다.&quot;라고 주장하지만, 햇볕정책과 상관없이 북한은 원래 호전적인 국가입니다. 이는 북한에 대해 강경책을 편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데서도 알 수 있죠. 햇볕정책은 이처럼 호전적인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바꾸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햇볕정책은 긴장관계를 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lt;br /&gt;
&lt;br /&gt;햇볕정책이 비난을 받는 또 다른 원인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은 연평도 도발이 있기 직전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였고, 이로써 북한의 핵 문제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quot;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으므로 실패한 정책이다.&quot;라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한 책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뿐만 아니라, 김영삼,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정부가 같이 져야 합니다. 사실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는 모두 북한의 핵무기를 개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할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북한은 차근차근 핵개발을 진행했고,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햇볕정책은 &quot;대화를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quot;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전문가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대화를 통한 해결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전쟁을 통한 해결이 있는데, 이는 클린턴 정부 때 미국에서 몇몇 인사가 주장한 방법이지만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쓴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북핵문제에 걸려 결국은 온건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카드를 제외한다면 북한 핵 문제는 대화로 풀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반도 주변국이 모이는 6자회담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보수적인 언론인 The Economist도 연평도 도발 이후 낸 칼럼에서 &quot;전쟁은 선택할 수가 없기에...결국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quot;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대화가 유일한 해답이기에 대화하라는 말이죠.&lt;br /&gt;
&lt;br /&gt;어쨌든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이제 남북한은 한동안 대치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남한에 대한 위협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고, 남한은 전쟁의 위협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시늉만 하고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가끔씩 대화의 자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는 다시 남한에 대한 무력시위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남북관계가 햇볕정책이 시작되기 전인 60-90년대의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뜻이죠. 과연 이러한 상황이 정말 햇볕정책을 쓰던 시절의 상황보다 좋은지는 각자 판단해 보면 알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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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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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1 Dec 2010 08:24: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 (탈)근대사회의 탄생- 끝</title>
			<link>http://cimio.net/748</link>
			<description>&lt;br /&gt;
&lt;br /&gt;르네상스 이후로 유럽인들은 역사를 그리스 로마 문화가 번성했던 고대,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무너진 중세,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근대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유럽인들이 르네상스 이후의 문화를 중세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구분은 매우 인위적이고 역사적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뚜렷이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봅니다. C.S. 루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quot;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quot; 과목 초대교수로 취임하면서 이 과목의 개설이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lt;br /&gt;
&lt;br /&gt;고대, 중세, 근대라는 구분법이 무너지면서 최근에 역사를 나눈 기준으로 떠오르는 것은 19세기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아직도 그 실체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19세기에 문학이나 예술, 철학의 영역에서 기존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의 근원이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lt;br /&gt;
&lt;br /&gt;역사 이래로 19세기 전까지 거의 어느 사회에서나 네 가지 질문(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신비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quot;그렇다&quot;였습니다. 물론 사회마다 구체적인 믿음은 달랐지만,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는 점에서 인류의 문화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면서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만물을 물질로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영혼은 두뇌로 환원되었으며, 인생은 의미를 상실했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철학자나 과학자는 이러한 지적인 발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과거의 신념과 새로운 세계관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이신론(Deism)은 전통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결합하려는 시도의 좋은 예입니다. 이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들었고, 더는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동시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곧 사람들은 &quot;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왜 신이 필요한가?&quot;라고 묻게 되었고 이신론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지금 돌아보자면 이신론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만 유용했고, 신비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자란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죠.&lt;br /&gt;
&lt;br /&gt;과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에도, 대중들은 19세기까지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즉, 19세기에도 보통 유럽인들은 교회에 나가고, 영혼에 대해 말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신비로운 현상을 봐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이해한 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루터교가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는 덴마크에서 &quot;기독교를 더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로 바꾸지 않는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다.&quot;라고 주장했고, 니체는 신이 존재할 여지가 없는 유럽의 지적 상황을 보면서 &quot;신은 죽었다.&quot;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키르케고르도 니체도 정신병자로 취급했지만, 이들의 사회 분석은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정확한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lt;br /&gt;
&lt;br /&gt;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quot;그렇다&quot;고 답하는 전통적인 세계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과학에 기초한 합리적인 세계관이 훨씬 설득력이 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인 큰 변화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60년대에 나타난 학생운동, 성 혁명,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의 몰락 현상 등은 모두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모두 &quot;아니다.&quot;라고 답하는 사람이 갑자기 증가하게 됩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은 곧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신, 영혼, 인생의 의미, 신비를 거부하고 나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자 대우주와 소우주가 만나는 신비한 존재에서 우연히 생겨난 우주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죠. 많은 사람은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꼈고, 이는 곧 과학에 바탕을 둔 기계적 우주론에 대한 반발로 이어집니다. 서양의 지배적인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심한 60년대가 곧 무신론의 유행으로 이어지지 않고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거부한다 할지라도,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완전한 거부는 곧 인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했던 것이죠.&lt;br /&gt;
&lt;br /&gt;요약하자면, 인류 대부분은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모두 &quot;그렇다.&quot;라고 답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네 가지 질문 중 몇 가지, 또는 전부에 대해 &quot;아니다.&quot;라고 답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가 같게 답한다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회에 다양한 관점이 혼재하는 혼돈의 시대가 된 것이죠.&lt;br /&gt;
&lt;br /&gt;오늘날 서양, 또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이 주류를 이룹니다. 즉, 대부분 정부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이는 정부가 종교를 배제한 채 정책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공교육도 종교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죠.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철저하게 종교의 영역을 제거하고 과학의 관점에서만 현상을 바라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경찰이 &quot;이 사람은 저승사자가 와서 잡아갔기에 죽었다.&quot;라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신이 있는지, 자신에게 영혼은 있는지 궁금해하며, 신비한 심령현상에 관한 책을 찾아 읽거나 종교적 체험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19-20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태도에 따라 자신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괴리는 현대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큰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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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guid>http://cimio.net/748</guid>
			<comments>http://cimio.net/748#entry748comment</comments>
			<pubDate>Tue, 23 Nov 2010 08:01: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연재] 네 가지 궁극적인 질문- 4. 신비는 존재하는가?</title>
			<link>http://cimio.net/747</link>
			<description>계몽주의 세계관의 바탕엔 &quot;합리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quot;이 존재합니다. 즉,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이 합리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이러한 믿음은 &quot;진리는 객관적이다&quot;라는 주장을 낳습니다. 만약 세상이 합리적이라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정보인 진리도 합리적일테고,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으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대부분 종교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종교에선 진리를 깨닫기 위해선 특정한 수련과정을 거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마음(영혼)이 준비되어야 하고, 이러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리 합리적으로 진리를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lt;br /&gt;
&lt;br /&gt;이처럼 계몽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기독교도 계몽주의 세계관에 맞춰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존 톨랜드(John Toland)가 쓴 &quot;기독교는 신비적이지 않다- 복음에는 이성에 반하거나 이성을 넘어서는 내용이 없으며 기독교 교리 중 신비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논문&quot; (Christianity Not Mysterious: A Treatise Shewing, That there is nothing in the Gospel Contrary to Reason, Nor Above It: And that no Christian Doctrine can be properly called A Mystery)는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갑니다. 이처럼 기독교를 신비의 영역에서 합리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은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유행을 낳았습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몽주의 세계관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quot;신비가 없는 세상이 좋은가?&quot;라고 묻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신비가 없을 때 생기는 문제점 중 하나는, 신비가 없다면 인간의 자유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존재고, 인간의 결정도 합리적이라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구공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충격을 받으면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은 100% 예측 가능하고, 인간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19세기에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quot;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 만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 존재는 우주의 미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quot;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quot;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quot;가 존재할 여지는 없습니다. 만물은 자연의 법칙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죠. 20세기에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에서 사회학과 수학을 결합한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그가 말한 심리역사학은 인류 전체를 놓고 본다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개인의 수준에서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가 조금은 인정되지만, 크게 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의 전통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계몽주의 세계관이 깨진 중요한 계기로는 양자역학의 발전을 들 수 있습니다. 뉴튼 물리학에선 만물이 당구대 위의 당구공처럼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비해, 양자역학에선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특정한 광자가 유리판에 부딪힐 때, 유리판을 뚫고 나갈지 유리판에 반사될지 예측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광자가 유리판을 뚫고 나갈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 뿐이죠.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결정론은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광자 하나의 움직임조차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세상을 기계론의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lt;br /&gt;
&lt;br /&gt;양자역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는 신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과거에 신비란 &quot;아직 이해되지 않은 영역&quot;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quot;영원히 알 수 없는 영역&quot;으로 인식되는 것이죠. 따라서 어떤 대상이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면 이러한 대상을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좋은 예입니다. 과거엔 사랑도 사회학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았고, 지금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 Both Sides Now에서 노래했듯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quot;I really don&#039;t know love at all&quot;), 사랑을 분석하는 대신 사랑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분석함으로 사랑의 신비를 해체하기 원하는 사람은 결국 사랑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lt;br /&gt;
&lt;br /&gt;신비라는 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세상이 합리적이고, 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이러한 결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중력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사과처럼 일정한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20세기에 유행한 실존주의 철학은 이처럼 숨 막히는 합리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quot;결정을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가 인생의 의미를 창조한다.&quot;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생을 합리성의 영역에서 신비의 영역으로 옮겨놓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죠.&lt;br /&gt;
&lt;br /&gt;계몽주의는 무지를 타파하고 미신을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신비를 제거함으로 세상을 무미건조한 장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계몽주의 때문에 인간에게 대자연의 신비를 가르쳤던 화려한 석양은 &quot;공기 중 먼지에 의한 빛의 산란&quot;으로 전락해버렸고,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은 &quot;이기적인 유전자가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호르몬을 분비하는 결과로 생기는 감정&quot;으로 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신비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만물을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물론 신비의 존재는 합리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비와 합리를 두 극단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두 개념의 공존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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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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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8 Nov 2010 00:18:1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 3. 인생은 의미가 있는가?</title>
			<link>http://cimio.net/746</link>
			<description>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로 목적론(teleology)의 유무를 들 수 있습니다. 고대철학, 그리고 고대 철학을 이어받은 중세철학에서 사물의 변화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설명되었습니다. 즉, 어떤 존재가 변화할 때, &quot;이 변화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quot;라는 질문이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죠.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는 &quot;무엇을 위해?&quot;라는 질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quot;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quot;라는 질문이 철학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변화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게 됩니다.&lt;br /&gt;
&lt;br /&gt;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자라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quot;무엇을 위해 씨앗이 자라는가?&quot;라는 질문이 중요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quot;씨앗의 잠재력을 실현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quot;라는 답이 나옵니다. 즉, 씨앗은 그 내부에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원동력이 있고, 이러한 힘이 씨앗을 자라도록 한다는 설명이지요. 하지만, 목적론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씨앗이 자라는 메커니즘, 즉 물과 영양분이 어떻게 흡수되고, 내부 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quot;무슨 일이 일어나는가?&quot;가 중요하지, &quot;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quot;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lt;br /&gt;
&lt;br /&gt;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론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목적론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든 사물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kosmos)의 모습을 띱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지구가 만물의 중심에 있고, 달 위의 세계가 &quot;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quot;에 이르기까지 각종 천상의 존재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도 그의 철학이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 철학과 과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지고, 기계론이 득세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 목적은 우연으로 대치되고,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닌, 은하계 변방에 있는 작은 별을 중심으로 떠도는 행성 위에 우연히 생겨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lt;br /&gt;
&lt;br /&gt;철학에서 목적론이 사라진 원인은 목적론을 유지하려면 인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말은 그 존재에 인격(person)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세상을 보려면 목적을 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존재가 목적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려면 모든 존재에 인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세상에서 인격을 배제하고 보기 원하는 서양철학의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격을 완전히 제외하고 세상을 보기도 어려운데, 이는 인간에게 인격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격의 존재 여부에 대해선 세 가지 주장이 존재합니다.&lt;br /&gt;
&lt;br /&gt;1. 세상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lt;br /&gt;
2. 세상 만물은 인격을 지닌다(또는 세상 만물은 인격적인 존재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lt;br /&gt;
3. 세상엔 인격을 지닌 인간과 인격을 지니지 않은 사물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1번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도 인격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이는 인간성 파괴로 이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기계엔 도덕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계라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죠). 2번은 결국 신비주의로 이어지고,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문명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2번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번은 1번 주장과 2번 주장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해결책인데,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왜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와는 다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lt;br /&gt;
&lt;br /&gt;언어철학은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언어철학자들은 &quot;인생의 의미&quot;라는 철학적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quot;인생&quot;이라는 단어와 &quot;의미&quot;라는 단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결국 &quot;인생과 의미는 결합하면 안 되는 단어들이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quot;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단지 언어적 오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에게 &quot;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의 착각일 뿐이다.&quot;라고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이 언어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죠.&lt;br /&gt;
&lt;br /&gt;목적론의 부재는 곧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특히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죠. 과거엔 교육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지를 가르쳤는데, 오늘날 교육은 어떻게 살지만 가르치지 무엇을 위해서 살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육을 마칠 때 문제 해결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생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것이죠.&lt;br /&gt;
&lt;br /&gt;이처럼 교육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종교나 가족, 또는 인간관계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철학자가 종교가 곧 붕괴하리라고 예언했지만, 실제로 종교인의 숫자는 더욱 늘어난 것은 종교가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동처럼 전통종교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 서양의 영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가는 서양인들처럼 인생의 방향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 특히 연애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욱 연애도 하고 싶고, 가족도 꾸리고 싶은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본능과 관련이 깊다고 보입니다.&lt;br /&gt;
&lt;br /&gt;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목적을 가정하지 않고 물질적 원인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을 강조한 것은 물질적 원인만 생각한다면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문화를 지배하던 2천 년간, 서양인들은 인생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철학의 소수파였던 유물론이 근대철학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려하던 대로 인생은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조적으로 인생이 의미를 잃은 이 시대에, 인생의 의미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그나마 운이 좋은 소수만이 &quot;내 인생은 의미가 있다.&quot;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근대철학의 발전이 진정한 의미에서 &quot;발전&quot;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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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guid>http://cimio.net/746</guid>
			<comments>http://cimio.net/746#entry746comment</comments>
			<pubDate>Mon, 01 Nov 2010 18:11:4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 2.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title>
			<link>http://cimio.net/745</link>
			<description>세상이 물질의 영역과 영의 영역으로 구성된다면, 인간도 몸과 함께 영혼을 지니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고대 문명에서 발견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근대까지 이어져,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도 인간에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lt;br /&gt;
&lt;br /&gt;인간이 몸을 지닐 뿐 아니라 영혼을 지닌다면, 몸과 영혼의 관계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화를 낸다면 이는 영혼의 반응인데, 동시에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빨라지는 등의 반응이 몸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몸과 영혼에 동시에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은 영혼과 몸이 연결되었다는 뜻이고, 데카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quot;두뇌 속의 송과선(Pineal gland)이 감각의 정보를 영혼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quot;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즉, 영과 물질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특수한 기관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송과선도 물질인데, 어떻게 이러한 물질이 영혼과 연결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죠. 엄밀히 말해 그의 이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의 존재를 독립된 실체로 가정하고, 이 둘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보입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각도에서 영혼과 몸의 관계를 조명합니다. 그는 신은 인간의 영혼과 몸을 동일한 구조로 만들었고, 따라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영혼과 몸은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가 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나의 영혼과 몸은 각각 분노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두 실체의 독립된 반응이고 몸이나 영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같은 속도로 작동하는 두 시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도 늘 같은 시간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죠.&lt;br /&gt;
&lt;br /&gt;하지만, 이렇게 영혼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벽에 부딪혔고, 결국 영혼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두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거에 &quot;영혼&quot;의 반응이라고 여겨지던 인간의 감정은 단지 두뇌의 반응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죠.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인간의 영혼(psyche)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심리학(psychology)조차 &quot;영혼이 없는 심리학&quot;(Psychologie ohne Seele)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도 했죠. 신이라는 개념을 불필요하게 만든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영혼도 불필요한 개념으로 만든 것입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영혼이 있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데카르트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것도 그가 가톨릭교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quot;생각하는 자아의 존재&quot;가 몸과 구분된다는 직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quot;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quot;로 본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나, &quot;영혼이 육체라는 장막에 거하는 존재&quot;로 보는 기독교의 교리도 이러한 직관과 잘 맞습니다. 그에 비해, &quot;인간의 영혼은 두뇌가 만들어내는 환상&quot;이라는 설명은 인간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lt;br /&gt;
&lt;br /&gt;우리나라에서 &quot;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quot;으로 소개된 이탈리아 소설 돈 카밀로에는 돈 카밀로 신부가 영혼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을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 카밀로는 이 사람에게 &quot;당신은 영혼을 믿지 않으니 내게 영혼을 파는 문서를 써도 되지 않겠는가?&quot;라고 제안하고, 결국 거래가 성사됩니다. 하지만, 영혼을 판 사람은 나중에 돈 카밀로에게 돌아와 &quot;잠이 오지 않는다.&quot;라며 영혼을 판 문서를 되찾아 갑니다. 그는 이성에 근거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지만, &quot;영혼이 존재한다.&quot;라는 직감을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이죠.&lt;br /&gt;
&lt;br /&gt;영혼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8% 같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amp;nbsp; 인간이 침팬지와 전혀 다른 이유는 인간의 영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매우 설득력 있죠. 또한, 인간의 영혼은 도덕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도덕을 &quot;사회가 만들어 낸 임의의 규정&quot;으로 보지 않고, &quot;절대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quot;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도덕을 &quot;영적인 질서의 표현&quot;으로 설명할 수 있고, 따라서 도덕을 어기는 행위는 영혼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 것이죠(해리 포터에는 &quot;살인을 하면 그 충격으로 영혼이 쪼개진다.&quot;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혼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살인이 꼭 나쁜 행동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도덕을 단지 어겼을 때 따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정으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온 대로 &quot;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를 끼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도덕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quot;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lt;br /&gt;
&lt;br /&gt;우디 앨런은 애니 홀(Annie Hall)을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마무리합니다. &lt;br /&gt;
환자: 의사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은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lt;br /&gt;
의사: 그러면 동생에게 &quot;너는 닭이 아니다&quot;라고 말해주면 되잖아요.&lt;br /&gt;
환자: 안되요. 저는 계란이 필요해요.&lt;br /&gt;
&lt;br /&gt;이 농담은 사랑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을 비유한 것인데, &quot;영혼은 환상이다&quot;라는 말을 늘 들으면서도 영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진리와 직관적 진리의 간극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는 실존적인 불안(Angst)의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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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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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5 Oct 2010 03:35: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네 가지 궁극적인 질문- 1. 신은 존재하는가?</title>
			<link>http://cimio.net/744</link>
			<description>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양한 철학자가 다양한 주제를 논하였지만,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quot;신은 존재하는가?&quot;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lt;br /&gt;
&lt;br /&gt;
과거엔 신의 존재 여부가 철학의 중요한 주제인 시절도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서양 철학과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세엔 수많은 신학자들이 철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죠.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이나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의 존재 증명법, 그리고 데카르트(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이지만,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중세적인 면도 강합니다)의 신 존재 증명 등은 이러한 노력의 예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하였고, 지금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quot;신은 존재한다&quot;는 가정에서 시작할 뿐이죠. 신의 존재를 증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기독교 철학가들의 지나친 열정이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quot;신은 존재하지 않는다&quot;고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버트란트 러셀이나 리처드 도킨스 등 유명한 무신론자도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quot;신의 존재를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quot;는 수준에서 신에 대한 불신을 합리화할 뿐입니다.&lt;br /&gt;
&lt;br /&gt;
이처럼 신의 존재나 부재는 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서양 철학이 신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서양 철학이 존재하기 전, 거의 모든 인간은 신에 대해 믿었습니다(지금도 서양 문명과 접촉이 적은 원시민족은 대부분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에 비해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이 등장한 이래로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아졌고(최초의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 아낙사고라스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중요해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이처럼 서양 철학이 신이 없는 사회를 낳은 것은 서양 철학이 신을 배제하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
그리스 문명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quot;만물의 근원은 물이다&quot;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만물이 물에서 나왔다는 말일 수도 있고, 만물이 물로 구성되었다는 말일수도 있기에 조금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의 전통을 이은 아낙시만드로스(&quot;만물의 근원은 무한자다&quot;)나 아낙시메네스(&quot;만물의 근원은 공기다&quot;)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 철학자들이 비인격적인 물질로 만물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quot;세상에 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quot;는 믿음과 &quot;인간의 이성은 세상의 합리적인 질서를 이해할 수 있다&quot;는 믿음이 결합될 때만 가능하죠. 이러한 믿음에 기초하여 철학자들은 점차 세상을 이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성을 통한 세상의 이해는 근대에 들어 과학혁명을 낳고, 17세기에 뉴튼이 &quot;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quot;를 쓰면서 정점에 이릅니다. 뉴튼은 자연의 움직임이 인간의 수학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였고, 그의 이론은 명쾌하면서도 정확해서 감히 그의 이론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lt;br /&gt;
&lt;br /&gt;
하지만, 이처럼 서양 철학, 그리고 서양 철학이 낳은 과학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게 되자 신은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을 믿었던 것은 신이 비를 내리고, 자녀가 생기게 하는 등 여러가지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고 믿는 인간은 농사를 지을 때도, 국가를 운영할 때도 신에 의존해야 한다고 느꼈죠. 하지만 이제 인간이 과학을 통해 자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많은 사람은 신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신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법이죠. 물론 아직도 과학만으론 세상을 설명할 수 없고, 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세상이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은 틈의 신(God of the gaps)을 만들 뿐이고, 과학이 발달하여 과학이 세상을 잘 설명할 수록 신의 영역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앞날이 어둡다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나폴레옹을 만난 자리에서, 나폴레옹이 라플라스의 책에 신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자 라플라스가 &quot;저는 그러한 가정(hypothesis)이 필요하지 않습니다&quot;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시대에 신은 필요 없는 개념일 뿐이죠.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고, 그래서 지금은 많은 사람이 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신이 없다는 생각은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이 없다는 말은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고(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또는 대표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믿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측면인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도덕, 정의 등의 개념도 의미를 잃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신이 없다는 결론을 피하려고 노력했고(예를 들어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신의 존재를 논하기 거부했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신의 존재를 가정한 칸트가 좋은 예죠), 어떤 철학자는 아예 신의 존재를 철학의 핵심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신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학을 한다고 말한 소크라테스가 좋은 예죠. 흥미롭게도, 현대인들이 신이 없다고 느끼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과학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의 존재를 확신하였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영국 국교회의 헌신적인 신자였고, 르네 데카르트는 가톨릭 신학을 지지하기 위해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을 썼으며, 요하네스 케플러는 천문학을 통해 창조주의 지혜를 드러내기 원했고, 뉴튼은 과학 연구만큼이나 성경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일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개인적인 신앙과는 별개로, 이들이 이룬 과학적 업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필요 없다고 느끼도록 했고, 결국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과학만을 놓고 보자면 신이 필요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과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도덕, 예술 등의 영역을 보자면 세상은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그렇기에 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할수록 종교를 믿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만 들리라는 예상과 다르게, 종교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남아 있고, 이러한 상황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lt;br /&gt;
&lt;br /&gt;
신의 존재는 앞으로 볼 다른 궁극적인 질문과도 연관이 깊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선 다음에 올리는 글도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lt;br /&gt;
&lt;br /&gt;
P.S. 혹시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을 까봐 덧붙이자면 저는 기독교인입니다.&lt;br /&gt;
P.S.S. 이번주에 밀라노에서 강의하느라 글을 늦게 올리게 되었네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강의는 잘 끝났고, 내일은 독일로 돌아갑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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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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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7 Oct 2010 06:01: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자전거로 만나는 유럽</title>
			<link>http://cimio.net/743</link>
			<description>다음 내용은 월간 &amp;lt;새가정&amp;gt;에 기고한 내용입니다.&lt;br /&gt;
&amp;nbsp;&lt;br /&gt;
&amp;nbsp; 내가 유럽의 자전거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사역지를 이탈리아로 옮기면서부터다. 당시 제주도에서 일하면서 주말이면 자전거로 제주도 곳곳을 여행하던 나는 유럽에 가면 자전거로 유럽 각국을 여행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사전조사를 열심히 하였다. 하지만, 막상 이탈리아에 가보니 산이 많아 자전거로 장거리이동은 어려웠고 도시 내에서만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들고 기차로 여행하며 피렌체, 밀라노, 로마 등에서 자전거를 탄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lt;br /&gt;
&lt;br /&gt;&amp;nbsp; 유럽은 자전거타기가 매우 활발한 곳이다. 특히 네델란드나 독일처럼 평평한 나라에선 출퇴근용으로 자전거를 매일 타는 사람도 많다. 유럽사람들은 자전거를 많이 탈 뿐 아니라 자전거의 활용도를 높일 보조장치도 적극 활용한다. 자전거 뒤에 연결하는 유모차가 그 예다. 이렇게 자전거 뒤에 달린 유모차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다섯 살이 되면 두발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워서 혼자서 자전거타기를 즐기고, 성장하면서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자전거 경주대회에 열광하다가, 어른이 되면 자신도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닌다. 유럽인에게 자전거는 삶의 동반자인 셈이다.&lt;br /&gt;
&lt;br /&gt;&amp;nbsp; 유럽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유럽인의 실용적인 태도와 함께,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면 공해문제, 주차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민의 건강이 좋아지기 때문에 유럽의 정부들은 자전거타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한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독일 남부의 아주 작은 마을인데, 이 작은 마을에도 도로 한쪽에 자전거도로가 있다. 자전거도로가 없는 곳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운전자들이 자전거를 존중하기 때문에 불안한 느낌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다. 한국에서 도로 한 쪽으로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몰아도 자동차들이 위협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도시의 자전거 도로는 보통 인도 한 쪽에 페인트로 표시된 길이기에 언뜻 보면 인도와 구분이 어렵다. 하지만, 유럽의 보행자들은 함부로 자전거 도로 위로 걸어다니지 않는다. 이처럼 유럽에선 자전거 도로가 제도뿐만 아니라 관습으로도 인정되기에 자전거를 마음 편하게 탈 수 있다. 또한, 기차나 지하철에도 자전거를 실을 수 있기에 집에서 기차역까지 자전거로 이동하고, 기차로 장거리를 이동하고 나서, 목적지에서 다시 자전거로 이동할 수가 있다. 물론 역마다 자전거보관소가 있어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여행할 수도 있다. 또한, 언덕이 많아 일반자전거를 타기가 어려운 이탈리아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전기자전거 구입비를 지원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amp;nbsp; 농촌에서 자전거타기는 자연을 즐기는 여유로운 활동이다. 밭과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다 보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도시에서 자전거 타기는 낭만적인 의미는 적지만 실용적인 가치가 크다. 유럽의 도시들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로 도시 어느 곳이나 다닐 수 있고, 다리만 튼튼하다면 차가 필요가 없을 정도다.&lt;br /&gt;
&lt;br /&gt;&amp;nbsp; 유럽의 도시에서 자전거를 탈 때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도난이다. 아무리 자전거를 자물쇠로 묶어놓는다 할지라도 절단기로 끊고 훔쳐갈 수도 있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자물쇠로 연결된 부분을 제외한 부분만 떼어 가져갈 수도 있다(실제로 유럽의 도시에선 바퀴나 본체만 가로등에 묶인 채 방치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자전거의 천국 네델란드는 동시에 자전거도둑의 천국이기도 한데, 네델란드에서 1년에 자전거가 130만 대가 팔리는데 그 절반이 넘는 70만 대가 도난당한다고 한다. 네델란드 정부는 이러한 자전거 도난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전거 등록제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자전거 등록제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자전거 등록제가 성공을 거두려면 자전거를 등록을 의무화해야 하고, 이는 자전거 구입자에게 많은 불편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또한, 자전거가 등록되었다고 자전거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다. 유럽에서 자전거 등록제가 제대로 정착한 나라가 없다는 사실은 이 제도의 도입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lt;br /&gt;
&lt;br /&gt;&amp;nbsp; 도시에서 자전거를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은 접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다. 접는 자전거는 휴대가 간편하기 때문에 대중교통과 연계하기가 쉽고, 실내에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도난의 우려도 적다. 접는 자전거의 문제는 싼 자전거는 무겁고, 가벼운 자전거는 비싸기에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다니던가 큰 돈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다. 점차 가벼우면서도 저렴한 접는 자전거가 개발되고 있으니 앞으론 접는 자전거가 더 많이 보급되리라고 예상한다.&lt;br /&gt;
&lt;br /&gt;&amp;nbsp; 유럽의 도시들은 차량 증가로 말미암은 교통 체증, 공기 오염, 주차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자전거타기를 장려하는 정책을 많이 편다. 자전거 대여서비스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이미 파리는 벨리브(Velib)를 시행 중이고, 독일은 철도회사인 도이치 반(DB)이 대도시에서 Call a Bike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한다. 런던도 최근에 1억 1천만 파운드를 들여 자전거 대여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전거 대여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도시 곳곳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사용하고 나서 근처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 자전거를 돌려주면 된다. 사용자가 자전거를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장기간 보관하지 않기 때문에 도난의 염려도 줄어든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사용요금이 비싸고(Call a Bike는 시간당 약 칠천원, 벨리브는 첫 30분 이용은 저렴하지만 오래 쓰면 시간당 요금이 만원 이상으로 올라간다.), 이용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선뜻 이용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자전거도둑 문제가 심각해서(파리는 벨리브를 운영한 지 18개월 만에 자전거의 절반을 도둑맞았다고 한다.) 서비스 운영자가 적자를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자전거 대여서비스는 자전거 이용자를 늘여 도시의 교통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많은 도시가 도입을 추진 중이다.&lt;br /&gt;
&lt;br /&gt;&amp;nbsp; 한국정부가 추진중인 자전거타기 활성화정책은 유럽 각국 정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한 내용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유럽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울 점이 많다. 동시에, 한국은 문화와 지리적 환경 등에서 유럽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유럽의 성공을 무조건 도입한다고 한국에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국이 정말 자전거타기 좋은 나라로 거듭나려면 정부가 한국의 현실에 맞는 지혜로운 정책을 추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행자와 운전자가 자전거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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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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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Oct 2010 16:48:0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집시와 유럽 연합의 미래</title>
			<link>http://cimio.net/742</link>
			<description>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들판에 캠핑카가 여러 대 서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자세히 보니 예상했던 대로 집시들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집시를 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같이 가던 독일 사람도 집시를 오랜만에 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에 신문을 보니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프랑스에 머물던 집시를 루마니아로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본 그 집시들도 프랑스에서 쫓겨나 루마니아로 돌아가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lt;br /&gt;
&lt;br /&gt;집시는 인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민족으로 유목민처럼 여러 지역을 떠돌며 생활하는데, 주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중세엔 이방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받던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서 나치 정권에 의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멸종의 대상이 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이들이 많이 사는 동유럽지역이 공산화되면서 이들의 문화를 파괴하려는 공산 정부에 의해 핍박받았습니다. 이제 나치 정권도 공산 정부도 사라졌지만, &quot;집시&quot;를 혐오하는 대중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고, 경기침체 때문에 사나워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정치세력에 다시 한 번 핍박을 받게 된 것이죠.&lt;br /&gt;
&lt;br /&gt;집시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만큼이나 유럽에서 이방인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줍니다. 유럽엔 여러 민족이 있고, 그만큼 민족 간의 교류가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quot;내 민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quot;는 안정감에 바탕을 둔 관계입니다. 하지만, 집시는 돌아갈 본국이 없고(루마니아에 집시가 많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집시는 소수민족이기에 간다고 환영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는 20세기 초반 유대인의 상황과 같죠. 당시 독일엔 유대인이 많았는데,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에겐 본국이 없기 때문에(이스라엘은 1948년에야 탄생했죠)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미국, 영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 유대인들을 받아달아고 요청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외국인(그것도 사람들이 안 좋게 여기는 민족)을 받아줄 나라는 없었죠. 이처럼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싫고, 유대인은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quot;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quot;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quot;유대인 문제&quot;(Die Judenfrage)죠. 결국, 이 문제에 대해 히틀러가 찾은 최후의 해결책 (Die Endlösung)은 유대인 학살이었고, 이것이 2차대전 중에 자행된 대학살의 실체입니다.&lt;br /&gt;
&lt;br /&gt;독일인의 유대인 대학살은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대부분의 유럽인은 이러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면 안 된다는데 동의합니다. 유럽인들이 자발적으로 국경을 허물고 국가 간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반성의 결과죠.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집시에 대한 탄압은 이러한 이상이 현실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쫓겨난 집시들은 루마니아 출신인데, 루마니아는 최근에 유럽연합에 가입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다른 유럽연합 국가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가 이들을 반강제로 쫓아냈다는 사실은 유럽연합 국가 간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해야 한다는 정신에 어긋나는 일로 지탄의 대상이 되죠. 또한, 상수도도 없이 생활하던 집시들의 정착촌을 허물었다는 사실은 인권을 중요시하는 유럽인들에겐 충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유럽인 중엔 인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기에 불법 정착촌을 건설한 집시의 죄 보다, 정착촌에 물을 공급하지 않은 정부의 죄가 크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lt;br /&gt;
&lt;br /&gt;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는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문제의 전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최근에 유럽연합에 가입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대단히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 두 나라엔 집시가 많은데, 이동에 익숙한 집시는 잘 사는 서유럽으로 대량 이동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프랑스 정부가 집시 몇 명을 본보기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더라도, 결국 더 많은 숫자가 프랑스로 이주하기 마련이겠죠. 프랑스 정부가 집시의 귀국을 조건으로 지원금을 준 데 대해 &quot;집시에게 휴가비를 줬다.&quot;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들이 곧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집시 문제는 결국 유럽인들이 추구하던 유럽 연합의 이상이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유럽인들은 유럽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유럽 지역의 모든 국가를 유럽연합에 포함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지는 나라들이 하나의 국경으로 묶이게 되었고, 이는 빈국에서 몰려오는 이민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유로존 국가간 경제차이 때문에 유로화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열린 국경까지 흔들리게 된다면 유럽연합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겠죠.&lt;br /&gt;
&lt;br /&gt;또한, 집시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프랑스는 &quot;자유 평등 박애&quot;라는 건국 이념에 반하는 이번 조치로 말미암아 정말 오늘날의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물려받은 나라인지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들어 이민자의 증가로 말미암아 많은 프랑스인은 외국인 혐오증이 심해졌고, 이를 틈타고 불법 외국인의 추방을 내세우는 극우파 정당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법행위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죠. 지금까지는 표면적으로나마 이주민과 백인의 통합을 추진해 온 프랑스지만, 백인들의 위기감이 더 심해진다면 외국인을 차별하는 극우성향의 정책이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죠.&lt;br /&gt;
&lt;br /&gt;결국 수천년간 가난과 핍박 속에 살아온 집시들에게, 21세기의 유럽 연합도 안정된 거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부디 유럽 국가들이 관용의 정신을 잊지 않고, 집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랄 뿐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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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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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8 Sep 2010 06:04:2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잠재력</title>
			<link>http://cimio.net/741</link>
			<description>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자들이 주목한 주제 중의 하나는 &quot;변화&quot;였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변화가 없고, 어떻게 보면 변화가 많은데,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실체는 무엇이고 변화는 왜, 어떻게 생기는지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철학적 사고의 중심에 놓은 대표적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보았는데, 불은 고정된 형체가 없고 순간순간 모양이 변하죠. 그가 보기에 세상은 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세상이 늘 변화한다면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제 일어난 일을 반복하려고 보면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가 말한 &quot;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다.&quot;라는 말은 이러한 신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건넌 강을 오늘 건너려고 한다면 어제 내가 건넌 강물은 이미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다시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따른다면 &quot;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quot;을 뿐 아니라, 같은 강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한 곳을 흐르는 강이 같은 강이 아니라면, 이 강을 하나의 이름(예를 들어, 한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화를 무한히 강조하다 보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lt;br /&gt;
&lt;br /&gt;헤라클레이토스와 동시대를 산 엠페도클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세상에 변화란 없고, 만물은 고정된 상태로 영원히 지속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변화란 어떤 존재가 자신이 아닌 존재(what is not)로 바뀐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quot;아닌 존재&quot;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이 부분은 한국어로는 설명이 좀 힘든데, 영어로 생각해 보자면 what is not이라는 말은 &quot;그렇지 않은 것&quot;이라는 뜻과 &quot;존재하지 않는 것&quot;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죠. 엠페도클레스가 이 두 가지 의미를 혼동했다고 보면 이해가 되긴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따라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뀔 수는 없고, 그렇다면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물론 그의 철학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크게 봐서 그가 변화를 부인하였다는 점은 학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동시에 부인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는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을 통한 인식이 참된 지식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 눈에 세상 만물이 변화한다고 해도, 이는 감각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뿐이죠. 이처럼 극단적인 주장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lt;br /&gt;
&lt;br /&gt;플라톤은 이데아의 개념으로 변화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의 철학에서 변하지 않는 실체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는 변화가 많은 그림자의 세계, 허상의 세계에 삽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많은 세계에서도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 이데아를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다양한 모양의 의자를 모두 의자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각 의자가 의자의 이데아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이처럼 플라톤의 철학은 세상의 변화도, 변화하지 않는 실체도 동시에 설명해줍니다.&lt;br /&gt;
&lt;br /&gt;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불변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잠재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잠재력은 사물 내부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물론 하나의 사물 속에 있는 &quot;가능성&quot;은 다양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잠재력이란 상황이 적절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없을 때 자연적으로 실현되는 가능성, 즉, 좋은 가능성입니다(오늘날도 &quot;잠재력이 있다.&quot;라는 말은 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죠).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변화는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이고, 이러한 변화는 무질서한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내부에 있는 질서를 따른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quot;물질세계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quot;라고 본 철학자들과 다르게,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죠.&lt;br /&gt;
&lt;br /&gt;물론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흔치 않지만, &quot;잠재력&quot;이라는 그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quot;자아실현&quot;이라는 욕구를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단지 내가 잘난 사람으로 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아실현은 내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는 뜻입니다. 즉, 내 잠재력을 실현하고 싶다는 뜻이죠.&lt;br /&gt;
&lt;br /&gt;잠재력의 실현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많은 인간, 특히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대부분 젊은이는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남을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할 때, 그가 감독으로서 남을 깜짝 놀라게 할 재능을 이미 보였을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대부분의 감독 지망생은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꿈꿉니다. 예를 들어, 비디오 가게 점원 쿠엔틴 타란티노나 트럭 운전사 제임스 캐머런이 영화계에 투신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속에 있는 감독으로서의 잠재력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quot;잠재력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quot;에 따른 모험은 창조적인 직업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죠.&lt;br /&gt;
&lt;br /&gt;잠재력의 실현은 종교적으로 볼 수도 있고, 종교를 배제하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이 &quot;열매를 맺으라&quot;였다고 기록합니다(창세기 1장 28절). 열매는 나무에 숨은 잠재력의 표현이고, 그렇다면 이 명령은 &quot;너의 잠재력을 발휘하라.&quot;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긴 후, 나중에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는 이야기)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잠재력의 실현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quot;신은 죽었다.&quot;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신이 없는 세상에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quot;초인&quot;(Übermensch)이라는 개념에서 살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했듯, 인간은 인간 이상의 존재로 진화할 잠재력이 있고, 이러한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의미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은 부인했을지라도, 잠재력 실현의 가치는 부인하지 않은 셈이죠.&lt;br /&gt;
&lt;br /&gt;니체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자 칼 융은 잠재력 실현의 단위를 인류에서 개인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 발달 과정을 개인화(individu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개인화란 집단에서 구분되지 않던 인간이 자신만의 특성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물론 이러한 개인화는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감추어진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봐야 하죠. 융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quot;내 인생은 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한 이야기다(My life is the story of the self-realization of the unconscious)&quot;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인생이 잠재력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잠재력을 지녔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내 안에 어느 방향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없다면, 나는 그 방향으로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에 비해 내 안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면, 특히 그러한 잠재력이 크다면, 나는 이러한 잠재력을 발휘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늘 실패감과 좌절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잠재력의 개념을 무시한다면, 인간은 삶의 방향을 잃고 맙니다. 만약 내 안에 나만의 고유한 잠재력이 없다면, 모든 사람은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야겠죠. 이는 융이 말한 개인화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quot;부자 되세요&quot;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개인의 잠재력을 무시한 획일화의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 잠재력이 있고, 이러한 잠재력을 잘 발휘해 돈을 번다면 좋지만, 그 사람의 잠재력이 돈의 영역과 전혀 상관없는데 돈을 많이 번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물론 돈에 관한 잠재력이 없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기도 불가능에 가깝겠죠).&lt;br /&gt;
&lt;br /&gt;잠재력을 중요시한다면, 인생은 모험이 됩니다. 잠재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눈에 보인다면 이는 이미 현실(actuality)이기 때문이죠. 잠재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늘 직관과 믿음에 속한 영역입니다. 따라서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길을 따라가는 모험이죠. 이러한 모험에 대한 동경은 흔히 여행의 욕구로 나타납니다. 여행은 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기에 모험이고, 이러한 모험은 숨어 있던 잠재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됩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 흥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러한 여행이 인생을 바꿀 잠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잠재력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만약 내가 지금 잠재력이 없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면 결국 이 일을 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진정으로 내가 잘할 소질이 있는 분야는 개발하지 못하겠죠. 반대로, 내가 진정으로 잠재력이 있는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하려면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안갯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느 쪽도 쉬운 결정은 아니고, 어느 쪽도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최소한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할 때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놓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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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과학, 심리학, 두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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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5 Sep 2010 05:51: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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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외국어 학습의 세 가지 모델</title>
			<link>http://cimio.net/740</link>
			<description>외국어 학습은 매우 간단한 활동 같지만,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만약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이해에 맞춰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 대부분이 영어 학습에 목숨을 걸어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이해가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발견하면 간단한 모델을 통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학습을 설명하는데도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해 볼 수 있겠죠.&lt;br /&gt;
&lt;br /&gt;많은 사람은 외국어 학습을 &quot;지식 획득&quot;의 모델로 이해합니다. 언어는 문법과 어휘로 구성되고, 따라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말은 문법과 어휘를 익히면 된다는 뜻이죠. 이러한 모델을 쓴다면 외국어 학습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초 수준의 문법을 익히고 중급 과정으로 넘어가면 되고, 가장 사용 빈도가 많은 단어 1,000개를 배우고, 그다음 단계의 어휘를 익히면 되는 식이죠. 이러한 모델로 생각할 때는 외국어 실력은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표준화한 시험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토익 등을 비롯한 외국어 능력 시험은 곧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는 잣대이죠.&lt;br /&gt;
&lt;br /&gt;이러한 지식 획득 모델은 외국어 학습 과정에 대한 신비감을 제거하고, 모두가 쉽게 따를 수 있는 학습 과정(문법과 어휘의 암기 학습 및 읽기 쓰기를 통한 연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외국어 학습을 민주화합니다. 즉 외국어 학습이 귀족 자제의 특권이 아닌, 국민이 모두 외국어를 배우는 시대엔 이러한 모델이 유용하다는 말이죠. 최근 취직이나 진학 시 외국어 성적을 평가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곳이 많은데, 이는 이러한 모델이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이 외국어 학습을 지식 획득으로 보는 모델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국어 학습이 단순한 지식 획득 과정이라면, 외국어 공부도 다른 공부처럼 노력에 따른 성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한민국 청년 중 영어공부에 목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또한, 영어 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면 말 한마디 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외국어 실력이 표준화 시험으로는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는 이 모델을 거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lt;br /&gt;
&lt;br /&gt;외국어 학습을 보는 또 다른 모델은 &quot;본질의 변화&quot;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모델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인간이 자라면서 환경과 문화에서 받는 영향에서 생겨나고, 따라서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에 노출되어서 학습자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즉, 과거에 나의 정체성이 &quot;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quot;이었다면, 이러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어 &quot;영어를 잘하는 사람&quot;이라는 본질을 얻어야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말이죠. &lt;br /&gt;
&lt;br /&gt;이러한 모델에서 조기 외국어 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따라서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워야 외국어가 학습자의 본질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죠. 이러한 모델에서는 만약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성인이 되어서라도 외국에서 생활해야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외국 생활이라는 극단적인 체험을 통해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외국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죠. 요즘 유행하는 영어 조기 교육이나 외국 어학연수 등은 이러한 모델이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본질의 변화 모델은 지식 획득 모델 보다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본질을 변화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외국어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제대로 가르쳤거나, 자녀를 어학연수 보내 본 분이라면 이러한 활동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지식 획득 모델에서는 책을 사서 혼자 공부하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든,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지식만 획득한다면 누구나 외국어를 잘할 수 있다고 보는데, 본질의 변화 모델에 따르자면 외국어는 일부 부유층의 특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죠. 또한,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라면, 본질을 여러 번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두 개나 세 개의 외국어를 배우기는 거의 불가능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여러 개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이는 본질의 변화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lt;br /&gt;
&lt;br /&gt;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동반하는 과정이라면, 외국어 학습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띄게 됩니다. 즉, 나의 본질이 &quot;한국어만 하는 사람&quot;에서 &quot;한국어와 외국어를 하는 사람&quot;으로 바뀐다면, 이러한 변화가 한국인으로 나의 정체성 또한 바꾸어 놓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치적으로 국제관계가 민감한 시기엔 외국어 학습이 대단히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quot;불어를 가르치면 아이를 망친다.&quot;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지 불어가 나쁜 언어이기 때문이 아니죠).&lt;br /&gt;
&lt;br /&gt;본질의 변화 모델은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의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그 존재 속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내 눈에 보이는 이 의자가 의자인 까닭은 이 의자가 의자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 만물은 본질을 지니고, 그렇기에 우리가 각 사물을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죠.&lt;br /&gt;
&lt;br /&gt;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본질에 대한 철학적 회의가 들어오면서 &quot;본질&quot;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가 늘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quot;물자체(Ding an sich)는 인간이 직접 이해할 수 없다.&quot;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인식론적으로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막아버린 셈입니다. &quot;존재는 본질에 앞선다.&quot;라는 사르트르의 주장도 본질의 위상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과학에서는 원자를 구성하는 양자의 세계가 발견되고, 이 세계를 전통적인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가 &quot;사물의 본질&quot;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의 의식 밑에 존재하는 잠재의식이 발견되었고, 칼 융은 인간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집단적으로 연결된다는 이른바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론을 내세우면서, 결국 인간 심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본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철학에서도 연구의 초점을 본질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옮겨놓은 현상학(phenomenology)이 생겨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얼굴, 즉 페르소나(persona)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페르소나란 나의 본질은 아니지만, 내가 외부와 관계할 때는 &quot;나&quot;의 역할을 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은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영화 속에선 늘 가난한 외톨이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본질이 &quot;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quot;이라면, 그의 페르소나는 &quot;가난한 외톨이&quot;라고 할 수 있죠.&lt;br /&gt;
&lt;br /&gt;이러한 페르소나는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일종의 페르소나이죠. 이러한 페르소나는 우리의 본모습과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이 주는 자유를 누리고자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말도 하고, 실제로는 겪지 않은 일도 겪은 듯 글을 쓰기도 합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인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외국어 학습에 적용해 본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 본질을 바꿀 필요는 없고, 가면 하나만 만들면 된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의사가 되었다가 운동선수가 되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만, 배우가 의사 역할을 했다가 운동선수 역할을 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 않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도 새로운 배역을 소화하기만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배우들은 연기할 때 배역에 몰입한다(get into character)는 말을 씁니다. 이는 내가 진짜로 그 배역인 양 행동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내가 하나의 언어를 배울 때도 그 나라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하면 분명히 외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어를 배우면 그 문화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모국 사람을 만날 때 어색하게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모국에서 온 사람들과 관계할 때는 모국에서 쓰던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죠.&lt;br /&gt;
&lt;br /&gt;영화 아바타는 이러한 외국어 학습 모델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미군은 다른 행성에 사는 나비족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기 위해 인간과 나비족의 DNA를 섞어서 아바타를 만듭니다. 이 아바타는 인간이 기계에 들어가 조종하게 되어 있는데, 아바타를 조종하는 인간이 앞서 말한 &quot;본질&quot;이라면 아바타는 &quot;페르소나&quot;라고 할 수 있죠. 미군이 이러한 기술을 개발한 이유는 지구인의 모습 그대로는 나비족에게 접근할 수도,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전혀 다른 문화속에 들어가려면 지금 모습으로는 어렵고, 새로운 가면, 즉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엔 표정, 몸짓, 행동, 사고방식 등이 포함되죠. 물론 완벽한 변신은 불가능하겠지만, 배우가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맡았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배역에 몰입하면 됩니다. &lt;br /&gt;
&lt;br /&gt;이러한 모델의 가장 큰 약점은, 이 모델을 따르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하는데,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이미 외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예를 들어 내가 일본인 사이에서 일본인처럼 행동하려면 일본인처럼 옷을 입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일본인처럼 말을 해야 하는데, 일본인처럼 말을 못한다면 일본인처럼 행동한다고 할 수가 없겠죠. 즉,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하고, 언어 능력을 갖추려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에 갇히고 만다는 점이 문제입니다(영화 아바타에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를 할 수 있는 나비족이 주인공의 언어 학습을 도와줍니다. 현실에선 나의 언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을 찾기가 쉽지 않겠죠).&lt;br /&gt;
&lt;br /&gt;이러한 세 가지 모델을 결합해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즉, 처음 외국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정보를 익히면 되고,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고 난 후라면 현지인의 페르소나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이렇게 현지인처럼 행동하다 보면 결국 내부에 변화가 생겨 현지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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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3 Sep 2010 04:02: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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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음식을 보는 또 다른 관점</title>
			<link>http://cimio.net/739</link>
			<description>&lt;br /&gt;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면서 한국 음식 재료를 많이 가져온 덕분에 요즘은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유럽 음식 위주로 먹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여기서 인터넷에서 구한 재료들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이제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까지 있으니 당분간은 한국 음식만 먹고 살 수도 있겠군요.&lt;br /&gt;
&lt;br /&gt;어떤 사람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다가 먹는 편이 더 싸다고도 하지만, 저는 음식은 단지 시간이나 돈의 문제로만 따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중요한 요소를 단지 계산기 두드려서 나오는 이익관계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죠.&lt;br /&gt;
&lt;br /&gt;식사는 몸이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이지만, 인간에게 식사란 관계와 연관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느 문화에서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식사를 함께하기 마련이고, 특히 자신이 직접 준비하는 식사는 상대방에 대한 최상급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꼭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해주길 원하고, 자식은 집을 떠나도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그리운 법이죠. 물론 과학의 관점으로만 보는 사람이라면 &quot;누가 어떻게 해준 밥이라도 필요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기만 하다면 좋은 식사다.&quot;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을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영양소뿐 아니라 밥을 짓는 사람의 정성도 밥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겠죠.&lt;br /&gt;
&lt;br /&gt;음식을 영양학의 관점에서만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가 미국인의 미만 문제입니다. 미국인 중엔 살찔까 봐 고기, 기름, 탄수화물, 유제품을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살찌기 쉬운 음식을 거의 매일 먹는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보다 비만율이 높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외식을 좋아하고,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먹지 않는 가정이 많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습니다. 즉, 아무리 영양을 고려해 먹는다고 할지라도, 집에서 요리해서 먹지 않고 밖에서 사 먹기만 한다면 결국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죠.&lt;br /&gt;
&lt;br /&gt;사 먹는 음식은 직접 해 먹는 음식보다 맛이 좋긴 하겠지만, 이러한 음식이 몸에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실 음식은 달고, 짜고, 기름질수록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지만, 이러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에 부담되겠죠. 또한, 음식을 사서 먹는다면 내가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선택할 수가 없어서 내 몸에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실험해 보기 어렵고, 내 몸에 맞는 음식을 알아도 메뉴에 없다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늘 음식을 사서 먹는 사람은 집에서 음식을 해서 먹는 사람보다 건강을 지키기가 훨씬 어렵다는 뜻이죠.&lt;br /&gt;
&lt;br /&gt;근대로 들어오면서 인간은 모든 것을 비인격적인 숫자로 환원하였고, 이는 음식의 영역에도 적용되어 효과적으로 음식을 수송해서 저렴하게 열량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식료품의 가격은 내려갔지만, 동시에 한 지역에서 음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지역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비만, 성인병 등의 문제는 점차 심각해졌습니다. 최근 들어 전통적인 영양학과 다른 관점에서 음식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난 원인도 이러한 근대화의 흐름이 낳은 부작용 때문이죠. 패스트푸드에 반발하여 천천히 만든 음식을 즐기는 슬로우푸드 운동이나, 자기 지역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자는 운동도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일부분입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039;s dilemma)에는 자신이 직접 기르거나 채집한 재료만 써서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음식을 경제에서 떼어내어 개인의 영역으로 다시 집어넣으려는 노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죠.&lt;br /&gt;
&lt;br /&gt;물론 대부분의 현대인, 특히 도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을 경제와 영양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관계,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보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조금이라도 요리와 식사를 인격적인 활동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된다면 현대에 들어 급증한 많은 질병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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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슬로우푸드</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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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Aug 2010 05:21:5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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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 이야기의 역사 5- 끝</title>
			<link>http://cimio.net/738</link>
			<description>애플은 애플 II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로 오늘날 컴퓨터 사용환경의 기본인 GUI를 대중화한 회사입니다. 80년대 말 이후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인텔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고전하던 애플은 90년대 말 일체형 컴퓨터 iMac을 내놓으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2000년대에 들어선 Unix를 기반으로 한 Mac OSX가 안착하고 인텔 CPU로 이주에 성공하면서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특히 컴퓨터 시장의 중심이 데스크톱에서 랩톱으로 옮겨오면서 뛰어난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환경이라는 강점이 두드러지며 컴퓨터 판매량이 급증합니다. 게다가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등 개인용 제품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iTunes Store를 통해 미디어 유통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 이제는 컴퓨터라는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IT,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설명은 애플이라는 회사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애플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lt;br /&gt;
&lt;br /&gt;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운 컴퓨터 회사로, 이들은 최초의 대중적인 개인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를 내놓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중이 컴퓨터를 좀 더 쉽게 쓸 수 있도록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원하던 스티브 잡스의 꿈은 매킨토시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애플 이사회는 결국 그를 회사에서 몰아냅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정체성을 잃고 특징 없는 제품을 내놓다가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결국, 회사의 문제를 깨달은 애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스티브 잡스가 세운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iMac을 내놓으며 애플이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2000년대 들어선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CEO일 뿐 아니라 대중을 열광케 하는 비저너리이고, 많은 사람은 그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키노트에서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발표는 모습을 보며 열광합니다.&lt;br /&gt;
&lt;br /&gt;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두번째 이야기엔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수만 명이 일하는 회사이고, 애플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그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회사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quot;애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quot;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모호하기 마련이죠(주주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이사회가 결정을 내렸다? 경영진이 결정을 내렸다? 담당 엔지니어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의 중심을 요구합니다. 애플의 경우엔 스티브 잡스가 그러한 역할을 하죠. 이러한 관점에서 애플의 특징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특징으로 환원됩니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폰트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잡스가 대학생 시절 calligraphy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고,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것은 잡스가 음악이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던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아이폰 4의 안테나 문제도 &quot;스티브 잡스의 독선, 고집,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quot;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lt;br /&gt;
&lt;br /&gt;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는, 이해를 위해선 대상에 인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인격체가 있다면 쉽게 이해하는데 비해, 간단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격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 없는 인격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기계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기계에 인격을 대입해서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기계가 잘 작동 안 하면 &quot;어,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quot;하겠죠).&lt;br /&gt;
&lt;br /&gt;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수많은 세포가 결합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죠. 그런데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세포 중에 어떤 세포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몸속에 침투한 병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그러한 예인데,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때 세포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꼭 인격의 단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세포를 묶는 &quot;인격&quot;(person)의 실체는 무엇일까요?&lt;br /&gt;
&lt;br /&gt;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격을 영혼(soul)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몸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백혈구가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통제하는 몸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백혈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quot;이 사람&quot;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영혼은 &quot;내가 나 일 수 있는&quot;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포는 늘 파괴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영혼을 소유하기에 &quot;나&quot;일 수가 있죠. 이처럼 영혼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 나오는 &quot;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quot;라는 질문도,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죠.&lt;br /&gt;
&lt;br /&gt;물론 근대 이후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와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quot;나는 누구인가?&quot;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죠. 나를 &quot;내 몸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의 집합&quot;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를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가 다른 사람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영혼을 제거하고 설명을 하려면 간단한 관계조차 설명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또한, 인간의 몸이 몇 년을 주기로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오늘의 나와 몇년 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물론 인간을 &quot;유전자&quot;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quot;이기적인 유전자&quot;),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와 다르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은 유전자는 설명해도 유전자가 구성하는 &quot;인간&quot;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입니다.&lt;br /&gt;
&lt;br /&gt;미국의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아(self)를 &quot;이야기의 무게중심&quot;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쓴 이야기의 중심인 자아(&lt;a title=&quot;[http://ase.tufts.edu/cogstud/papers/selfctr.htm]로 이동합니다.&quot; target=&quot;_blank&quot; href=&quot;http://ase.tufts.edu/cogstud/papers/selfctr.htm&quot;&gt;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lt;/a&gt;)에서 그는 인격이 없지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만들어내듯,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두뇌에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내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quot;나&quot;라고 주장합니다. 즉, &quot;나&quot;는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는 말이죠. 조금 황당한 주장이지만, &quot;영혼&quot;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quot;자아&quot;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quot;자아&quot;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지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quot;내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quot;이 아니라, &quot;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이 필요하다.&quot;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인간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혼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lt;br /&gt;
&lt;br /&gt;대니얼 데넷이 말한 바로는 인간이란 자신에게 &quot;나는 물질을 넘어서는 존재다&quot;라는 환상을 늘 심어주며 사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로봇과 마찬가지로 기계일 따름이지만, 영혼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A.I. 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quot;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quot; 또는 &quot;동물처럼 단순한 두뇌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정도의 복잡한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가?&quot;라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는 Douglas R. Hofstadter가 Gödel, Escher, Bach에서 제시한 모델(무의미한 기호가 의미를 낳는 과정)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영혼도, 자아의 실체도 부인하는 이 철학자가 이야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자아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으로 이야기를 쓰며 삽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생으로 쓴 이야기가 내가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데 영감을 불어넣게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 원하는 것도, 이야기를 접해야 자신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기 때문이죠. 부모가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교과서만 읽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면 할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쉽겠죠.&lt;br /&gt;
&lt;br /&gt;&amp;nbsp;지금 서점에 가면 &quot;이야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는 법&quot; &quot;이야기를 통해 마케팅하는 법&quot; 등의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이 가르치는 내용은 대부분 &quot;이야기를 이용해 남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quot;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위에 군림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의 남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로부터 인생의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전통적인 기준과 가치가 무너져 인생의 방향을 찾기 어려워진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야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야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조종(manipulation)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이야기를 찾아, 그 이야기에 맞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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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문화</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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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5 Aug 2010 06:27: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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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재] 이야기의 역사 4</title>
			<link>http://cimio.net/737</link>
			<description>사회의 중심이 이야기에서 이성으로 옮겨오면서 이야기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학문과 예술 곳곳에서 생겨났는데, 이중 가장 흥미로운 예는 역사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불어의 histoire, 이탈리아어의 storia, 독어의 Geschichte 등). 이는 &quot;역사의 아버지&quot;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설명한 이래로 역사와 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죠. 하긴 일반인이 생각하는 역사란 &quot;어떤 사람이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고,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다.&quot;라는 기록이기에, 이야기의 세 가지 요소를 그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역사학계로 번지면서 &quot;이야기 없는 역사&quot;를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결국 아날학파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아날학파에서는 인물, 정치,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거부하고, 양적인 자료에 의해 사회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quot;구체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벌이는 사건들이 일으키는 결과,&quot; 즉 이야기를 배제한 역사학을 하겠다는 말이니, 이제 이야기와 역사가 분리된다는 말이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아널드 토인비가 역사학에 분업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역사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한탄했을 때 이미 예견할 수 있던 문제입니다.&lt;br /&gt;
&lt;br /&gt;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음에도 이야기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또 다른 영역으로는 문학을 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듣기 원하는 욕구는 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어느 민족을 봐도 가장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학작품의 대부분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현대주의 문학을 추구한 제임스 조이스(특히 Finnegans Wake)나 사무엘 베케트(특히 Malone Dies) 등은 실제로 이야기가 사라진 작품을 씁니다. 물론 이야기가 사라진 문학은 대단히 기괴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문학에까지 미친 좋은 예이기에 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역사학과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 이야기로부터 독립한 데 비해, 철학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야기로부터 독립합니다. 특히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의 세계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험을 강조한 경험론자들은 조금 낫긴 하지만(베이컨은 New Atlantis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썼고, 버클리는 플라톤처럼 대화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습니다), 경험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에서는 이야기가 거의 사라집니다. 칸트를 비롯한 독일의 관념론자들도 이야기를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를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lt;br /&gt;
&lt;br /&gt;
철학은 이야기로부터 일찍 독립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역보다 이야기의 가치를 일찍 재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키르케고르는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의 한계를 깨닫고 좀 더 인간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을 찾고자 노력하는데, 그의 작품 중엔 이야기의 형태이거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 책이 많습니다(예를 들면 Stages on Life&#039;s Way나 Fear and Trembling). 니체도 이성 중심의 철학에 대해 반발하여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quot;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quot;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철학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철학과 다시 결합한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철학에서 이야기의 부활은 20세기에 들어 프랑스로 이어져 사르트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죠.&lt;br /&gt;
&lt;br /&gt;
20세기에 들어 이야기가 부활한 가장 좋은 예로는 영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가 파괴된 시기에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이야기를 공급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사의 초기부터 대중은 악당을 응징하는 영웅,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는 남녀 등 매우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열광하였고,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가장 잘 만든 미국의 영화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학계에서 벌어진 이야기 파괴 현상은 영화계를 피해 가지 않았고, &quot;이야기(내러티브)를 탈피한 영화&quot;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60년대 이래로 많이 있었지만, 결국 영화의 주류는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화를 만들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하고, 이러한 자본을 얻기 위해선 대중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죠.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영화는 다른 현대 예술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사이에 대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lt;br /&gt;
&lt;br /&gt;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TV 드라마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미국 드라마건 한국 드라마건 뚜렷한 줄거리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미국에서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트콤 사인펠드인데, 사인펠드에는 가끔 이야기가 없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The Chinese Restaurant가 좋은 예인데, 중국음식점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이 에피소드에는 상황은 있지만, 줄거리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해체된 것이죠. 극 중 사인펠드와 조지 코스텐자가 방송국에 가서 시트콤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quot;이야기가 없는 극을 만들고 싶다&quot;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이 작품을 만든 사인펠드와 래리 데이비드(조지 코스텐자는 래리 데이비드의 분신이죠)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인펠드는 지극히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현대 예술계의 흐름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습니다(또 하나의 파격적인 사인펠드 에피소드인 The Betrayal은 시간의 역순으로 극이 진행됩니다. 같은 형식의 영화 Memento 보다 몇년이나 먼져 나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이처럼 합리성에 밀려 사라지던 이야기는 합리성에 대한 실망과 대중예술의 발달이라는 두가지 원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으며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번에 쓰도록 하겠습니다.&lt;br /&gt;&lt;br /&gt;P.S. 연재를 시작해 놓고 글을 제 때 올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출장이 있었고, 시차 적응 등으로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쓸 여유가 잘 없었네요. 다음주에는 꼭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변함없이 블로그에 찾아와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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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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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5 Aug 2010 04:48:4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이야기의 역사 3</title>
			<link>http://cimio.net/736</link>
			<description>이야기에서 출발한 인간의 역사는 이야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듭니다. 즉, 인격과 구체성, 단순한 인과관계를 배제하는 대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합당한 진리를 찾게 된 것이죠. &lt;br /&gt;
&lt;br /&gt;이야기에 의존하는 생각은 어린아이의 사고와 비슷합니다. &quot;크리스마스에 받는 선물은 어디서 생겼는가?&quot;라는 질문에 대해 아이들은 &quot;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상을 주는 것이다.&quot;라는 설명을 믿습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이러한 말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른이라면 &quot;그렇다면 산타클로스가 24시간 안에 전 세계에 다니면서 수십억 명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야 할 텐데, 이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실일 리 없다.&quot;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언뜻 생각하기에 맞는 말처럼 보이는 말을 믿지만, 어른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보편적인 상황에 맞는 말을 믿는 것이죠. 결국, 사고력이 자라면 아이도 산타클로스라는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죠. 어쩌면 인류가 이야기를 벗어나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게 된 것도 인류의 사고력이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lt;br /&gt;
&lt;br /&gt;이처럼 이야기를 배제하고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수학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숫자는 세상이 논리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자,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논리와 수학의 결합은 수(numbers)를 만물의 근원으로 본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고, 근대에 들어선 &quot;세상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다&quot;고 말한 갈릴레이에서 보듯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신념이 되었으며, &quot;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quot;(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에서 물리현상이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뉴턴에서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숫자의 세계엔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오직 메마르고 건조한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죠.&lt;br /&gt;
&lt;br /&gt;이처럼 이야기 중심의 사회가 논리와 숫자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인간관계도 변하게 됩니다. 과거에 인간들을 묶어 주었던 이야기가 사라지면서 숫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quot;인간을 숫자로만 이해하려고 한다.&quot;라는 불평은 이러한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이죠. 이야기로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배웠던 우리 조상과 다르게, 우리는 숫자(연봉,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TV 인치 수, 그리고 트워터 팔로윙 수)에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뉴턴의 물리학에서 보듯, 인간은 숫자를 통해 세상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도 숫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합리론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인간도 세상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세상이 숫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인간도 숫자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을 분석하고 연구한다면, 결국 인간의 본질을 숫자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인간을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위험한 주장으로 들립니다. 인간은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어떤 부분(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숫자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와 숫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원인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lt;br /&gt;
&lt;br /&gt;인간성 파괴는 단순히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특히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가 뛰어난 과학기술을 대량살상 무기 만드는 데 썼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뛰어난 기술로 가스실을 건설한 독일인들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상실한 채 기술과 지식만 의존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는 예죠. 또한, 선진국일수록 정신질환자가 많다는 사실은 현대 문명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현대인들은 목적을 &quot;어떻게&quot; 이루는지 잘 알지만, &quot;무엇을&quot; 목표로 삼아야 하고, &quot;왜&quot; 그런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수학은 이처럼 인생의 목표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영혼의 영역이고, 영혼은 수학이 아닌 이야기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고 느끼는 사람 늘어날수록, 이야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거에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이야기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새롭게 부활하게 됩니다. 다음번엔 이야기의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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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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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6 Jul 2010 04:02:2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이야기의 역사 2</title>
			<link>http://cimio.net/735</link>
			<description>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야기는 지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인격성과 구체성 때문입니다. 역사의 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quot;이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quot;라는 인격의 구체적인 활동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통합해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있는 별을 묶어 만든 별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인류는 별자리를 통해 무질서해 보이는 하늘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별들을 인격 단위로 무리지어 묶어놓고 나니, 하늘에는 수많은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난무하였고, 이러한 별들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질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lt;br /&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cfile6.uf.tistory.com/image/196EF7164C3F307F61BBD4&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constellations.jpg&quot; height=&quot;381&quot; width=&quot;610&quot;/&gt;&lt;/div&gt;&lt;br /&gt;
&lt;br /&gt;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통합하는 지식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했고, 결국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 물질적 실체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리토스 등은 이러한 좋은 예죠. 이렇게 인격이 없는 물질에서 세상의 근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과학의 발달을 낳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비인격적이어야 하는데, 만약 연구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라면 변덕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과학에서 하나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이 대상이 기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로 작용할 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인과관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직관에 반하지만, 논리적인 결론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직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지구가 해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과학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인 인격성, 구체성, 직관적인 인과관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래서 대부분 민족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얽매여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lt;br /&gt;
&lt;br /&gt;
물론 그리스인들도 하루아침에 이야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철학계에서조차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탈레스만 해도 &quot;만물은 신들로 가득하다.&quot;라고 말했고,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격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였기에 전형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lt;br /&gt;
&lt;br /&gt;
그리스 철학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야기(예화)를 통해 설명함으로 이야기와 철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과 이야기를 결합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철학에 종속시킨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고,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 셈이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동원했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는 이성에 의해 창조된 도구라는 점에서 &quot;인간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quot;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quot;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당시의 시인은 서정시인이 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깝습니다)을 추방해야 한다.&quot;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이야기와 철학이 충돌할 때는 철학이 이야기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
플라톤에서 발견되는 철학과 이야기의 불안한 동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이야기의 완벽한 소멸로 끝이 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야기는 분석의 대상(그의 저서 시학이 잘 보여주듯)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나누는 동반자는 아니었고, 결국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은 이야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lt;br /&gt;
&lt;br /&gt;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합리성의 전통은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낳았고, 이 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니 사람들은 이야기가 그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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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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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6 Jul 2010 01:00:1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재] 이야기의 역사 1</title>
			<link>http://cimio.net/734</link>
			<description>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인간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해야 세상을 이해하고, 그럴 때에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세상에서 짧은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lt;br /&gt;
&lt;br /&gt;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점차 세상을 이해하였고, 이는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도왔습니다.&lt;br /&gt;
&lt;br /&gt;이야기가 이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비인격적인 현상이나 존재에 인격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person)이기 때문에, 인격을 지닌 존재를 잘 이해하고, 그에 비해 인격이 없는 존재에 대해선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이진법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컴퓨터가 모든 데이터를 이진법으로 바꿔서 처리하듯,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은 모든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을 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격이 없는 지구가 해를 바라보면서 24시간에 한 바퀴 돈다는 설명보다는, 태양신이 불마차를 끌고 종일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을 한다는 설명이 인간에겐 훨씬 이해하기가 쉽죠. 견우성과 직녀성이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서로 가까운 듯 보인다는 설명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떨어져 지내다가 1년에 한 차례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준 다리 위에서 만난다는 설명은 훨씬 매력적입니다. 이러한 인격화의 과정을 통해 비는 하늘이 내리는 눈물로 바뀌고, 천둥은 죄인에 대한 하늘의 심판, 태풍은 바다의 분노로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죠.&lt;br /&gt;
&lt;br /&gt;또한, 이야기는 세상에 구체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추상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훨씬 잘 이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듣기 원했고, 이야기는 이러한 필요를 잘 채워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quot;바닷물은 왜 짠가?&quot;라는 질문에 대해, &quot;강물에 녹아 있는 소량의 소금이 바다로 계속 모여들고, 물은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짜다&quot;라는 설명은 구체성이 부족합니다. 그에 비해 &quot;먼 과거에 바다를 알기 원했던 소금 인형이 바닷속에 뛰어들어 녹았고, 그래서 짜다&quot;라는 설명은 &quot;소금인형&quot;이라는 구체적인 존재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에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구체성은 특히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때 중요합니다. 대부분 민족은 한 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특한 정체성을 얻을 때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구체성이 없기에 대부분 민족은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한국의 단군,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스위스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영구동맹, 미국의 Pilgrim Fathers)에서 기원을 찾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lt;br /&gt;
&lt;br /&gt;마지막으로, 이야기는 세상을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해줍니다. 철학에서 인과관계라는 개념은 매우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불을 관찰할 수 있고, 연기를 관찰할 수 있지만, 불 때문에 연기가 난다는 인과관계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대부분 사람은 인과관계를 철석같이 믿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이 발생한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인과관계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quot;청개구리는 왜 비가 오면 울까?&quot;라고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quot;청개구리는 어머니 말씀을 반대로 하다가 오해가 생겨 어머니를 강가에 묻었는데, 비가 오면 어머니 무덤이 걱정돼서 운다.&quot;라는 설명이나 &quot;인종마다 피부색이 다른 원인&quot;이 궁금한 사람에게 &quot;신이 도자기 굽듯 인간을 구웠는데, 굽는 시간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quot;라는 설명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많은 사람에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복잡하고 논리적인 해답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quot;A라는 존재가 B라는 행동을 했기에 C라는 결과가 생겼다.&quot;라는 해답은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기 때문이죠.&lt;br /&gt;
&lt;br /&gt;이렇게 이야기는 인격, 구체성, 인과관계라는 틀을 제공함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세상을 이해하였습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이야기 중심의 문화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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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category>동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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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신화</category>
			<category>이야기</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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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8 Jul 2010 00:36:2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자녀와 친구 같은 부모</title>
			<link>http://cimio.net/733</link>
			<description>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띕니다. 과거에 대부분 사회에선 부모가 자녀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선 부모, 특히 아버지가 윗사람이 되어 아랫사람인 자녀를 마음대로 통제했죠. 가장(Pater Familias)이 가족에 대해 생사여탈권(ius necandi)을 지녔던 로마 사회는 이러한 좋은 예입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군사부일체라 하여 아버지는 임금과 스승에 비견되는 권위를 누렸습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유럽이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논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는 장자끄 루소였죠. 루소는 에밀, 또는 교육에 대하여(Émile ou de l&#039;éducation)에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게 보고, 억압적 교육으로 이러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망가트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인간을 본능으로부터 단절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던 전통적인 교육관에 반기를 든 것이죠.&lt;br /&gt;
&lt;br /&gt;루소 등이 주창한 새로운 교육이론은 아이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전까지 아이들은 &quot;철부지&quot;고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quot;어른&quot; 처럼 존중되어야 할 &quot;어린이&quot; (아이를 존중하는 이 표현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20세기에 들어서야 탄생합니다)이자, 어른은 잊어버린 선한 본능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지닌 어른의 스승이지요. 그러니 &quot;아이는 어른의 아버지&quot;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말이 나와도 당연한 일이죠.&lt;br /&gt;
&lt;br /&gt;아이가 이처럼 귀중한 존재라면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도 자녀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녀의 속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본성을 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통해 파괴하면 안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새로운 자녀 교육 이론은 권위에 대해 부정적인 진보계통에서 큰 인기를 끕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부모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자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데 비해, 진보적인 가정에선 부모가 자녀를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배우가 되고 싶은 아들의 꿈을 억눌러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보수적인 부모를 보며, 진보주의자라면 &#039;나는 저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039;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부모와 자녀가 평등하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친구 관계를 모델로 삼을 것입니다. 친구는 능력과 지위가 평등한 사람이 만나 서로의 호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하는 관계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 중엔 &quot;친구 같은 부모&quot;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기 때문에 친구 같은 부모가 되는 데 대해 큰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lt;br /&gt;
&lt;br /&gt;물론 &quot;친구 같은 부모&quot;란 멋있는 말이긴 하지만, 실천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친구는 평등한 관계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와 부모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 평등하다면, 갓난아기도 가사를 돌보고, 밖에 나가 돈도 벌어와야겠죠. 그리고 부모가 아기 기저귀를 갈아준다면 아기도 부모의 빨래를 대신 해 주는 식으로 보상해야 마땅하죠.&lt;br /&gt;
&lt;br /&gt;자녀가 자라 학교에 갈 나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완전히 평등해 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교육 경쟁이 심한 사회에선, 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녀는 공부하고, 부모는 돈을 벌어와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나 부모의 투자나 결국 유익은 자녀가 얻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는 자신을 위해 살고, 부모도 자녀를 위해 살기 때문에 부모 자녀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lt;br /&gt;
&lt;br /&gt;감정적인 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돈과 마찬가지로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하며 삽니다. 그런데 부모 자녀 관계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감정을 쓰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감정을 얻으며 삽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랑 같이 있길 원하고, 부모는 자녀가 달려들면 (처음에는 좋겠지만) 결국 힘들어서 거리를 두기 마련이죠. 자녀가 부모한테 &quot;놀아줘~&quot;하고 조르기는 해도, 부모가 자녀한테 &quot;놀아줘~&quot;하고 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누가 감정을 벌고, 누가 감정을 쓰는지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lt;br /&gt;
&lt;br /&gt;이렇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한쪽을 돕는 관계는 평등할 수가 없고, 친구의 모델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가 &quot;친할&quot;(즉, 감정적으로 가까울) 수는 있지만,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재정적 부담을 평등하게 지는 친구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부담은 대부분 부모 몫이기 때문이죠. 또한, 판단력이 떨어지는 어린 자녀를 올바르게 이끌 책임은 부모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자녀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인생을 망칠 위험이 있다면, 부모는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해야겠죠. 친구라면 누가 누구를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친구로서 충고할 수 있을 뿐이죠.&lt;br /&gt;
&lt;br /&gt;&quot;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quot;(Don&#039;t Sleep, There Are Snakes)에 나오는 피다한족은 부모가 자녀를 진정으로 평등하게 대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잘 보여줍니다. 아마존 유역에 사는 원시 부족인 피다한족 어린이도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따라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면 부모가 자녀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 걸음마를 익히는 아이가 모닥불 곁에서 아장아장 걸어도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지 않고, 어린 아이가 칼을 가지고 장난해도 말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성인 남성과 진한 터치를 해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어리석은 행동을 자신이 선택한다면 자신이 고통을 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이런 정도로 자녀의 인격을 존중한다면 진정 &quot;친구 같은 부모&quot;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 부모는 아이를 끔찍하게 아끼고, 아이가 잘못되면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자녀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자녀가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고,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를 지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부모의 간섭은 자녀가 성인이 되어갈수록 줄어들어야 마땅하고, 자녀가 성인이 된다면 대등한 관계로 전환해야 하겠죠. 하지만, 그전까지는 어른의 판단력을 지닌 부모가 자녀의 인격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어린 자녀의 인생을 지도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lt;br /&gt;
&lt;br /&gt;참고 글- &lt;a title=&quot;[http://babytree.hani.co.kr/archives/2979]로 이동합니다.&quot; target=&quot;_blank&quot; href=&quot;http://babytree.hani.co.kr/archives/2979&quot;&gt;‘친구같은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lt;/a&gt;&lt;br /&gt;
&lt;br /&gt;P.S. 제가 지지난주엔 독일에서 1주일간 출장을 다녀왔고, 지난주엔 한국에 오느라 글을 못올렸습니다. 블로그 운영에 매우 소홀했음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에서 또 다른 회의에 참석중이고, 7월 말이면 다시 독일로 출국합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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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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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9 Jun 2010 01:16:2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삼성의 미래</title>
			<link>http://cimio.net/732</link>
			<description>최근에 스티브 잡스가 WWDC 에서 아이폰 4를 발표하면서 아이폰은 다시 한 번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애플이 내놓은 아이폰 4는 기존의 아이폰이 지닌 중요한 약점(낮은 해상도, 화상통화용 카메라의 부재)을 보완하였기에 구입을 망설이던 사람도 선뜻 지갑을 열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이러한 애플의 신제품 발표 때문에 갤럭시 S를 같은 날 발표한 삼성은 대단히 곤란을 겪는 듯한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애플의 아이폰 3GS와 비교해서 하드웨어가 훨씬 좋다는 보도자료를 계속 제공하던 삼성은, 새로나온 아이폰 4가 갤럭시 S보다 더 얇은 등 하드웨어 성능이 별로 뒤질 것이 없기에 마케팅 포인트를 잡기가 어려워진 것이죠.&lt;br /&gt;
&lt;br /&gt;사실 애플의 신제품 발표는 삼성에 꼭 나쁜 소식은 아닙니다. 이미 언론에 많이 공개되었듯 아이폰의 주요 부품은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이 제공하고, 따라서 좋은 아이폰이 개발되어 많이 팔린다면 아이폰에 들어가는 프로세서, 메모리 등을 공급하는 삼성은 엄청난 수익을 얻겠죠. 그럼에도, 삼성이 아이폰의 성공에 불편해하는 것은 단지 갤럭시 S를 비롯한 휴대전화 판매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인이 애플에 매력을 느낄수록, 삼성은 &quot;변화해야 한다&quot;는 압력을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lt;br /&gt;
&lt;br /&gt;삼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회사이고, 세계 많은 기업이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삼성은 존경보다는 경계의 대상이고, 많은 사람에게 삼성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삼성에 비판적인 사람에겐 애플이라는 회사가 삼성의 문제점을 극복한 대안으로 보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애플이 아이폰으로 거둔 성공은 곧 삼성에 변화를 요구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들이 던지는 &quot;삼성은 왜 애플이 될 수 없는가?&quot;라는 질문은 정말 삼성이 애플과 똑같은 회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삼성이 애플만큼 소비자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기업철학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quot;우리는 제조회사이고, 애플은 혁신회사이니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계속하면 된다&quot;는 삼성의 답은 이러한 질문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lt;br /&gt;
&lt;br /&gt;물론 삼성의 경영진은 누구보다도 영리하고, 이들은 필요에 따라 삼성의 기업문화를 여러 번 바꾸었습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은 &quot;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다 바꾸라&quot;며 삼성 개혁에 나섰고, 이는 삼성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업의 영역을 봐도, 메모리 분야는 세계 최고였지만 수익성이 좋은 비메모리 부분이 취약하던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부분 개발에 눈을 돌려 지금은 아이폰을 비롯한 수많은 휴대용 기기의 프로세서를 공급할 정도로 비메모리 분야에서 앞서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삼성이 변화할 수 없는 집단은 분명히 아닙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지금까지 삼성이 겪은 변화와, 지금 애플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가 삼성에 기대하는 변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지금까지 삼성이 겪은 변화는 기업 철학은 그대로 두고, 사업 방식, 사업의 영역만 바꾸는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정말 애플 같은 기업이 되려면 기업의 철학을 재정비해서 단지 돈이 되는 상품이 아닌, 소비자가 매혹을 느낄만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각 직원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합니다. 이는 지금 삼성을 특징짓는 과로와 야근, 그리고 상명하달식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죠. 또한, 마케팅과 언론플레이를 통한 제품 띄우기가 아닌, 소비자의 자발적인 호응이 나오도록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는 힘으로 경쟁사와 소비자를 억누르는데 익숙한 국내 대기업이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이죠.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비대한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법 앞에 다른 기업과 평등한 위치로 내려가야 합니다. 지나치게 큰 권력을 누리는 회사가 혁신에 앞장설 수는 없기 때문이죠.&lt;br /&gt;
&lt;br /&gt;하지만, 삼성이 이처럼 뼈를 깎는 노력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이러한 변화 없이도 이미 삼성은 국내에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큰 회사이고, 세계적으로 봐도 규모가 엄청나게 큰 기업니다.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는 회사가 무엇 때문에 힘들게 변신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삼성은 주식회사로 구성되긴 하지만, 실제로 삼성의 방향은 주주가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결정합니다. 지금 삼성의 문화는 이건희 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이건희 회장의 성격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 이상 삼성의 문화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결국, 많은 젊은이는 삼성이 애플처럼 세계인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기업이 되길 기대하지만, 현실을 놓고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그저 삼성이 애플만큼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이라는 사실에 대해 만족해야겠죠. 하지만, 같은 돈을 벌면서도 왜 어떤 기업은 존경받고 어떤 기업은 그렇지 못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당장은 돈을 벌어도 미래는 어두울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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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삼성</category>
			<category>아이폰</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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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Jun 2010 02:33:1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진보와 개혁</title>
			<link>http://cimio.net/731</link>
			<description>6.2 지방선거가 끝나고 인터넷에선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의 단일화 거부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오세훈 후보가 한명숙 후보에게 신승을 거둔 이번 선거에서, 만약 노회찬 후보가 자진하여 사퇴해서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면 한명숙 후보가 넉넉하게 당선이 되었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러한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이죠. 이러한 논쟁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벌어지는데, 조지 W. 부시가 알 고어를 힘겹게 이긴 2000년 미국 대선 때도 알 고어 지지자들이 녹색당 후보 랄프 네이더를 엄청나게 비난했고, 극우파 장-마리 르팽이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꺾고 결선에 진출한 2002년 프랑스 대선때도 알렛 라기에를 비롯한 군소 좌파 후보들에 대한 투표가 잘못이었다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lt;br /&gt;
&lt;br /&gt;
노회찬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논의야 이해하기 쉬우니, 노회찬 후보의 사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생각해 봅시다. 이를 위해선 진보와 개혁이라는 두 가지의 정치적 견해를 이해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진보와 개혁은 여러모로 비슷하기에 혼동하기가 쉽습니다. 진보나 개혁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보호, 그리고 시장의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등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우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누가 진보이고 누가 개혁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보는 현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따라서 극단적으로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현 체제를 인정하고 문제만 보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개혁과 차이가 납니다. 즉, 진보는 개혁보다 훨씬 강도 높은 변화를 요구하는 셈이죠.&lt;br /&gt;
&lt;br /&gt;
진보와 개혁의 차이는 &lt;a title=&quot;[http://blog.ohmynews.com/blurrytie/326920]로 이동합니다.&quot; target=&quot;_blank&quot; href=&quot;http://blog.ohmynews.com/blurrytie/326920&quot;&gt;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서도 구분&lt;/a&gt;됩니다. 신자유주의는 20세기 말에 들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한 흐름인데, 개혁 정치인 중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강화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 등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개혁 정치인의 대표죠. 하지만, 진보 정치인이라면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형태인 신자유주의를 엄격하게 부인합니다.&lt;br /&gt;
&lt;br /&gt;
세계적으로 보자면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은 모두 개혁에 속합니다. 미국의 녹색당 등은 진보에 속하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권력을 잡았거나 잡을 가능성이 큰 정당은 보수거나 개혁입니다. 진보가 권력을 잡았거나 잡을 가능성이 큰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이는 진보가 원하는 만큼 극단적으로 사회를 바꿀 용의가 있는 선진국 국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진보는 소수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정치세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크지는 않더라도 정치를 건전하게 하는 소수의 목소리 역할을 하는 셈이죠.&lt;br /&gt;
&lt;br /&gt;
한국은 군사독재와 싸우는 수십 년간 진보와 개혁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진보와 개혁이 자연스럽게 분리되었죠.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 2004년 민노당의 원내진출은 진보가 드디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진보와 개혁을 혼동하였고,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개혁 정당은 민노당, 그리고 진보신당에 단일화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개혁 정치인들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작게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 노무현 대통령도 &lt;a title=&quot;[http://www.seoprise.com/board/view_nw.php?uid=133638&amp;amp;table=seoprise_12]로 이동합니다.&quot; target=&quot;_blank&quot; href=&quot;http://www.seoprise.com/board/view_nw.php?uid=133638&amp;amp;table=seoprise_12&quot;&gt;자신을 &quot;진보&quot;라고 설명&lt;/a&gt;했고, 이는 &lt;a title=&quot;[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7213.html]로 이동합니다.&quot; target=&quot;_blank&quot; href=&quot;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7213.html&quot;&gt;유시민 후보&lt;/a&gt;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진보 정당이 보기에 진보와 개혁은 전혀 다른 두 사상이고, 따라서 개혁 후보가 당선되어도 진보의 이념 실현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독재의 망령이 꿈틀대는 한국에서 이념을 가릴 것 없이 잘못된 권력과 싸워야 할 필요는 분명하고, 그렇기에 심상정 후보도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지만, 길게 본다면 진보는 개혁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진보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보 진영 내부에서 높습니다. 노회찬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완주는 이러한 진보 진영의 생각을 반영했다고 봐야겠죠.&lt;br /&gt;
&lt;br /&gt;
개혁이 진보보다 훨씬 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의 bear hug는 진보에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좋아야 성립되지 일방적인 구애는 성희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개혁 정당이 보수 정당을 완벽하게 이기지 못한 선거 결과를 놓고 볼 때 개혁주의자들은 답답할 수 있겠지만(저도 개혁주의자로서 많이 답답하게 느낍니다), 개혁과 진보를 다르게 보는 진보주의자의 관점에서 개혁과 진보의 무조건 통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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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category>6.2 지방선거</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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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3 Jun 2010 16:44: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6.2 지방선거의 의미</title>
			<link>http://cimio.net/730</link>
			<description>뜨거운 열기 속에 치러진 6월 2일 열린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선거는 천안함 사태로 말미암아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선거 막판이 되면서 북풍보다는 현 정부에 대한 지지와 반대가 선택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쉽게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양상이 전개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결과를 놓고 보자면 전통적인 민주당, 한나라당의 텃밭인 호남, 영남을 제외하고 볼 때 강원 지사, 충남 지사 등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민주당의 압승, 한나라당의 참패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나라당은 안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경남에서 무소속 김두관 후보에게 도지사자리를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하였고, 한동안 패배의 후유증을 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이번 선거의 특징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이 대통령은 천안함이 침몰한 직후 보이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갈수록 대북강경책을 내놓으면서 남북관계를 대치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사태는 지방선거의 중심을 &quot;지역 발전&quot;에서 &quot;전쟁과 평화,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임과 불신&quot;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여권은 이러한 변화가 보수층을 결집하고 지난 10년간의 햇볕정책이 실패하였음을 보임으로 야당을 무력화하리라고 기대하였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사실 &quot;북풍&quot;이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은 1987년 대선이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론 남북관계가 좋아지건 악화하건 선거엔 큰 영향이 없는데, 청와대와 여당은 안일하게 남북 간의 긴장상태가 선거에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이러한 심리는 &quot;다행히 천안함이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했다.&quot;는 여당 인사의 발언에서도 드러납니다.) 생각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만난 것이죠. 또,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시위 2주년에 즈음해서 &quot;반성할 줄을 모른다.&quot;고 시민을 꾸짖는 발언을 함으로 2년 전 자신이 했던 대국민사과성명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였고, 많은 시민은 정부가 정신 차리도록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기에 그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lt;br /&gt;
&lt;br /&gt;이번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정치인으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들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의 판세를 가른 당선자 중엔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가 깊은 인물이 많습니다. 안희정 후보, 이광재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기에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김두관 후보는 &quot;리틀 노무현&quot;으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을 닮은 정치인이죠. 이러한 노무현 관련 인사들의 대거 당선은 국민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마음으로 받아들인 증거고, 앞으로 &quot;노무현 정신&quot;이 한국 정치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집니다.&lt;br /&gt;
&lt;br /&gt;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트위터를 통한 투표 독려 운동입니다. 아마 지난 며칠간 트위터에 들어온 분이라면 곳곳에서 쏟아지는 투표 독려 트윗을 보며 &quot;투표를 안 했다간 죄인 된 기분 들겠다.&quot;라는 부담감에서라도 투표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트위터 사용자들의 노력은 실제로 투표율을 올리는데 이바지했고, 이번 선거는 15년 만에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방송이나 언론에서 투표를 격려하는 캠페인은 많았지만,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투표 독려 메시지는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lt;br /&gt;
&lt;br /&gt;이러한 투표 격려 운동은 선거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요소입니다. 많은 언론은 한쪽 후보가 일방적으로 앞선다고 보도하였고, 많은 유권자는 &quot;내가 투표해봤자 별 의미가 없겠네&quot;하고 투표를 포기하기가 쉬웠죠. 하지만, 투표 격려 때문에 투표에 나선 사람이 많았기에 여론조사(특히 전화 여론조사)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지역이 많습니다. &lt;br /&gt;
&lt;br /&gt;지금 한국의 트위터 가입자가 100만 명이 훨씬 안 되는데, 만약 트위터 사용자가 앞으로 10배가 늘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트위터는 선거의 판세를 바꿀 중요한 통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트위터 사용자들이 특히 투표에 열심히 나선다면 트위터를 많이 쓰는 나이(아마도 20대 중반-40대 중반)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이들을 위한 정책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트위터에 영향력을 빼앗긴 보수 언론에서 트위터를 견제하기 위해 &quot;트위터 중독의 위험&quot; 등에 관한 기사를 더 많이 내보낼 가능성도 크죠.&lt;br /&gt;
&lt;br /&gt;이번 선거는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당에도 큰 숙제를 남겼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인터넷에는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준 유권자 중에 민주당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민주당이 예뻐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 미워서 표를 줬으니, 민주당은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고민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죠. 실제로 젊은 유권자 중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반사이익에 만족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거듭날지를 지금부터 고민해야 다음 선거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어쨌든 이번 선거는 많은 국민이 선거의 중요성을 깨닫고 투표와 투표 독려라는 방법으로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선거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선거 참여 열기가 높아져서 국민을 우습게 아는 정치인을 바로바로 솎아내서 정치를 바꾸게 되길 기대합니다.&lt;br /&gt;
&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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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3 Jun 2010 06:00: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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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안함 사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인가?</title>
			<link>http://cimio.net/729</link>
			<description>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조사가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면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강경한 표현을 쓰기 좋아하는 북한은 연일 공격적인 말투로 한국 정부를 비난 중이고, 우리 정부도 이번엔 밀리지 않겠다는 식으로 강하게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곧 전쟁이 난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북한 전쟁 선포설, 예비군 동원령 등 잘못된 정보를 담은 문자 메시지까지 돌아다니면서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합니다.&lt;br /&gt;
&lt;br /&gt;북한이 핵무기를 소유한 지금, 남북 간의 전쟁은 한반도 전체의 파괴를 의미하기에 작은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온 국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실제로 전쟁이 날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우선, 주가와 환율의 변동을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주가와 원화가치가 대폭 떨어졌는데, 그 원인은 남북관계의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다시 찾아오면서 한국을 비롯한 고수익 고위험 시장에서 저수익 저위험 시장인 미국으로 돈이 옮겨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난 며칠간 원화뿐 아니라 유로화도 가치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변동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한반도의 위기가 반영된 주가, 환율 변동 폭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크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계에선 이번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작다고 본다는 뜻이죠.&lt;br /&gt;
&lt;br /&gt;아마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상황을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물리적인 변화가 원인이 아닌, 시스템상의 문제가 원인이었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쳤다고 공장이 사라지거나 원자재가 증발하는 것은 아니죠. 단지 경제활동에 어려움이 새기면서 상품이나 부동산의 경제적 가치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전쟁은 이와는 다릅니다. 전쟁이 나면 경제활동이 둔해질 뿐 아니라 물리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서울 시내에 있는 거대한 빌딩이 폭격으로 무너지면, 그 빌딩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집니다(이론상으로 땅의 가치는 남긴 하겠지만). 어느 회사의 공장과 연구소, 본사가 모두 파괴된다면 그 회사의 주식은 휴짓조각이 됩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말미암은 주가와 환율의 변동은 경제위기로 말미암은 변동보다 훨씬 커야 마땅합니다. 1997년 당시 외화부족 사태를 맞아 환율이 두 배 반 정도 오르고, 주가가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생각할 때 지금이 전쟁의 위기를 앞둔 상황이라면 이보다 큰 수준의 변동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변동폭은 이보다 훨씬 적습니다.&lt;br /&gt;
&lt;br /&gt;제가 전쟁의 가능성이 작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남북 지도자들이 전쟁을 원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나서, 전쟁이 일어날 뻔 한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전쟁이 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은 남북 지도자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이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쟁의 위험에 대해 떠들면서 내부적 결속을 다졌고, 반대파를 탄압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회만 되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남북관계 개선이 남북의 대치 상태보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도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정치적 목적을 이룬 후 슬그머니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큽니다.&lt;br /&gt;
&lt;br /&gt;하지만, 이번 사태가 꼭 전쟁을 피하는 쪽으로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치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한쪽에서 실수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아니면 실무착오로 무력이 행사된다면 이는 곧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죽일 마음은 없지만(그러다가 자신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옆에서 갑자기 소음이 난다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서 둘 다 죽을 수 있죠. &lt;br /&gt;
&lt;br /&gt;이러한 비극은 평상시에는 상대방에게 연락함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사고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고 인정한다면 우선 사태를 확인할 동안만이라도 대응을 자제하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치상태에서 적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우리 군도 즉시 반격에 나서고, 일단 쌍방 무력사용이 시작된다면 전쟁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냉전 시대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핫 라인을 열어 놓고, 혹시나 상대방의 실수로 말미암은 무력 사용이 전쟁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막았습니다. 남북한도 1971년 부터 남북 연락관 통화용 직통전화를 설치하여 만약에 발생할지 모르는 실수로 말미암은 충돌을 피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결국 2008년 직통전화선이 끊겼습니다. 지금 북한군이 박격포라도 쏜다면, 우리 군은 이것이 실수인지, 상부의 의지와 다르게 말단 지휘관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 길이 없기에 반격을 해야 하고, 우리가 반격하면 이는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말이 안 통하니 주먹질이 시작되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셈이죠.&lt;br /&gt;
&lt;br /&gt;어쨌든 저는 어렵게 마련된 한반도의 평화 기조가 한순간 날아갔다는 점에서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과연 이렇게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 몰라 불안에 떠는 상황이 많은 국민이 원하는 상황일까요? 부디 이번 사태가 무사히 끝나고, 다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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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사회</category>
			<category>전쟁 가능성</category>
			<category>천안함</category>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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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7 May 2010 00:11: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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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여전히 남는 천안함 의혹</title>
			<link>http://cimio.net/728</link>
			<description>20일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명시하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합조단은 이러한 결론을 내린 근거로 사고 지점에서 발견된 북한 어뢰 잔해 등을 증거물로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우리 정부는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책임으로 몰고 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힌 셈이 되었고, 미국 등 우방국도 이에 동조한다는 사실을 볼 때 한반도의 긴장은 당분간 풀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lt;br /&gt;
&lt;br /&gt;
이제 조사가 끝났으니 더는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의혹은 없어야 하는데, 저는 발표를 보며 전보다 더 많은 의혹이 생겼습니다. 합조단이 증거라고 내 놓은 자료가 너무도 엉성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인 어뢰 잔해를 봅시다. 이 어뢰는 형태가 너무도 잘 보존되었기에 한눈에도 어뢰 잔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어뢰가 1,200톤급 초계함을 두 쪽 냈다면 대단한 폭발을 일으켰는데, 남은 폭발하면서 자신은 고스란히 형태를 보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를 들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quot;히로시마 중심부에서 원자 폭탄의 잔해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quot;라는 발표가 나온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도시 전체를 파괴한 폭탄이 자신은 모양을 보존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죠. 마찬가지로, 천안함을 파괴한 어뢰도 파편 일부분이 발견될 수는 있어도 껍데기만 빼고 알맹이는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군사전문가인 김성전 국방정책연구소장도 미디어 오늘과 인터뷰에서 &quot;그 어뢰 수거물은 250kg 폭발력을 가진 어뢰 본체에 붙어있는 장치인데 과연 이렇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quot;라고 회의적인 견해를 밝혔죠.&lt;br /&gt;
&lt;br /&gt;
물기둥이 100미터 솟았다는 증언의 신빙성도 떨어집니다. 천안함에 타고 있던 사람 중에서 물기둥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군은 물기둥이 없다는 사실을 &quot;버블 제트가 터지는 위치에 따라 물기둥이 옆으로 퍼지면 안보일 수도 있다&quot;는 설명을 했습니다. 물론 밑에서 떠오르는 버블 제트가 배에만 위 방향을 작용하고 물에 대해선 옆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중요한 사실은 과거엔 군이 &quot;물기둥은 없다.&quot;는 전제를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기둥을 본 증인이 있다니 어리둥절할 뿐입니다.&lt;br /&gt;
&lt;br /&gt;
합조단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하루 전, 군은 유실되었다고 알려졌던 가스터빈실을 인양했습니다. 가스터빈실은 큰 충격을 받고 떨어져 나간 부위로, 만약 천안함이 어뢰로 침몰했다면 화약흔이나 어뢰 파편이 많이 발견될만한 중요한 부위입니다. 그런데 합조단은 가스터빈실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고 준비한 자료만으로 예정대로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합조단이 얼마나 성의없이 조사를 마무리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정말 한 점의 의혹이 남지 않는 조사를 발표하려면 예정된 날짜를 연기하고 가스터빈실을 조사해야 마땅합니다. 또한, 그 작은 어뢰 잔해도 찾아내면서 사고 지점에 그대로 가라앉은 40톤이 넘는 거대한 물체를 지금에야 인양했다는 사실 자체도 의혹의 여지가 많습니다.&lt;br /&gt;
&lt;br /&gt;
이번 합조단의 발표는 남북관계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정부가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믿는다면 이는 최소한 남북관계 경색과 이로 말미암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일으키고(벌써 하루 만에 원화 가치와 주가가 크게 떨어졌죠), 만약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면 전쟁으로 말미암은 국가적 재앙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띄는 발표치고는 너무 의혹이 많이 남습니다.&lt;br /&gt;
&lt;br /&gt;
북한을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려면 한 점의 의혹이 남지 않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줘야 마땅하죠. 부디 앞으로라도 국민의 의혹을 없앨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2.0/kr/&quot; target=&quot;_blank&quot;&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 2.0 대한민국 라이선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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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imio</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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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1 May 2010 15:12: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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