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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구들장 지고 우주 유영</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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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14 May 2012 10:56: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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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지독한 정상</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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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구들장 지고 우주 유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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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다</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51</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이 글은&amp;nbsp;6월 12~13일 1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다녀온 뒤에 썼으며, &amp;lt;르몽드 디플로마티크&amp;gt; 7월호(7월 9일 발행)에 실렸습니다. 7월호가 발행되던 날,&amp;nbsp;다시 1박2일 일정으로 2차 희망의 버스를 탔습니다.&amp;nbsp;&lt;br /&gt;
&lt;br /&gt;부산 영도 일대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는 일은 이곳 부둣가를 따라 빽빽이 들어선 타워크레인들의 꼭짓점을 잇는 일이다. 멀리 지나치며 볼 때, 그 괴이한 철골 구조물들은 땅에 버티고 선 게 아니라 스카이라인에 주렁주렁 매달린 듯 보인다. 시인 기형도풍(‘안개’·1985)으로 말하면, 타워크레인은 이 도시의 ‘성역’이자 ‘명물’이다. 이곳에 처음 온 이들은 누구나 얼마 동안은 경계심을 늦추는 법 없이 낯선 크레인의 숲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라, 사람들은 쉽게 크레인과 식구가 되어, 그 사이를 흘러다닌다. 크레인은 자주 짙은 해무에 갇힌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 &lt;/SPAN&gt;&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1937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다. 그곳에 선 지 30년도 더 된 85호 크레인 역시 이 일대 거대한 크레인 숲에서는 그저 한 그루의 고목나무인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습관은 그곳에 이르러 별안간 낯섦과 마주한다. 그 많은 크레인들 역시 85호로 인해 쇠붙이가 아닌 산 나무가 된다. 85호의 지상 35m 지점에는 둥지 하나가 있다. 그곳이 특별한 것은 둥지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파랑새 때문이다. 그 새의 이름은 ‘김진숙’이다. 흔한 이름이다. 아니, 흔한 건 이름뿐이다. 그 이름에서 파생한 모든 현상은 낯설다. 특별하고 고유하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br /&gt;
&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SPAN&gt;&lt;br /&gt;
&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gt;&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P style=&quot;MARGIN: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cfile9.uf.tistory.com/image/196480344E1A5640341FDC&quot; alt=&quot;&quot; filemime=&quot;&quot; filename=&quot;cfile9.uf@196480344E1A5640341FDC.jpg&quot; height=&quot;626&quot; width=&quot;550&quot;/&gt;&lt;p class=&quot;cap1&quot;&gt;일러스트레이션 / 이강혁 &lt;/p&gt;&lt;/div&gt;&lt;/SPAN&gt;&lt;/P&gt;&lt;/SPAN&gt;&lt;/SPAN&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녀가 둥지를 튼 지 157일에서 158일째로 넘어가던 지난 6월 12일 꼭두새벽, 85호 크레인 아래에 사람들이 모였다.(1) 서울에서, 수원과 평택에서, 전주와 군산에서, 광주와 순천에서 버스를 타고 온 이들은 족히 750명을 넘었다. 버스의 이름은 ‘희망의 버스’였다. ‘희망’이라는 말은 묘해서, 뜻은 더없이 밝고 환하지만, 그 말이 딛고 선 현실은 정작 잿빛임을 스스로 방증한다. 희망은 ‘비현실’과 ‘유예된 현실’ 사이에서 유동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발화하는 순간, 유예된 현실 쪽으로 다가서려는 의지의 정향이 작동하고, 마침내 이렇듯 긴 버스의 대열을 이루기도 한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일부 언론은 85호 크레인 아래 모인 이들이 ‘노동단체’ 사람들이라 했지만, 물색없는 소리다. 서울발 1호차 내부만 들여다봐도 훤한 사실이다. 파업 1300일을 넘긴 유명자 재능교육 지부장 등 두엇 말고, 버스에 오른 45명 가운데 노동단체 사람은 없었다. 1987년 고문사한 대학생 김종철의 아버지, 1991년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아버지에게 소속은 없다. 사회활동 이력이라곤 자원봉사뿐인 주부와 복학을 앞둔 대학생은 동행조차 없었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온 노을이는 초면에 대뜸 고양시 육상대회에서 3등 한 것부터 자랑하는 12살 소녀다. 노을이의 소속은 초등학교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주노총 행사 같은 곳에서 보던 일사불란함이 있을 리 없다. 애초 그것은 번개모임이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좌석 번호는커녕 버스 호수조차 배정되지 않았다. 삼삼오오, 또는 짝으로, 더러는 홀로 버스에 올랐다. 그들을 아우르는 공통점은 자발적으로 정해진 계좌에 참가비를 입금했다는 사실뿐이지만, 그것은 또한 공통의 정향을 품은 입금이었다. 버스 안에서 처음 얼굴을 대하는 이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흡사 고해(告解)를 하는 듯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꿈, 그리고 부채 의식을 누구나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마치 현실과 꿈과 부채 의식이 ‘희망의 번개’를 방전하는 3대 요소 같아 보였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크든 작든, 각자의 현실은 ‘불안’과 동거하고 있었다. 누구는 현재의 비정규직이고, 다른 누구는 미래의 비정규직이었다. 서울 강남의 최고 부자동네에서 학원강사를 한다는 한 여성은 이날 “잘릴 각오를 하고” 한진중공업 사태를 주제 삼아 수업한 뒤 버스에 올랐다고 했다. 유명자 지부장, 그녀는 1300일 넘게 일을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버텨왔다. 각자의 꿈은 1인분을 겨우 감당하는 소박한 것들이었고, 크다고 해봐야 그 1인분의 꿈들이 함께 평화롭게 기대고 조화하는 것이었다. 노을이는 동물학자가 꿈이었다. 유명자 지부장은 학습지 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받아 다시 일하고 싶다는 빤한 꿈을 가슴에 사무치게 품고 있었다. 가까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닿기 어려운 이 시대의 꿈이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세 가지 중 마지막 하나, 부채 의식은 김진숙의 고행을 바라보는 가슴앓이였다. 또한 그것은 불안이 습관이 되고, 꿈을 환기하는 일이 외려 낯설어진 일상을 뒤흔든 그녀에 대한, 말 그대로 채무자의 감정이기도 했다. 김진숙은 크레인 위에서 단단히 버티며, 자신이 둥지를 튼 크레인의 해발고도와 깔고 앉은 평수, 쇠붙이로 이루어진 공간의 낯섦을 통해 하루하루가 고단하다는 이들로 하여금 개별적 고단함의 가벼움을 돌아보게 했다. 습관이 된 일상은, 안개를 걷어내듯 그녀가 들춰낸 현실과의 아득한 거리감 앞에서 흔들렸다. 김진숙이 그 낯섦의 장치로 그들 가슴에 격발한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고, 그들은 가슴속 채권에 셈을 치르지 못해 안절부절못한 것이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85호 크레인 아래, 얼기설기 무대가 세워졌다. 무대 위로 불려나온 이들은 누구나 신문 지면에 얼마간, 물론 예외 없이 예능 프로그램 후일담보다는 드물고 짧았지만, 이름이나 사연이 오른 적이 있었다. 1895일간 파업하며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봤다”는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은 행사 진행팀 ‘깔깔깔’의 표식인 고깔모자를 썼다. 스머프 같았다. 그녀가 스머프라니…. 쌍용자동차 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콜트·콜텍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소속 노동자들…. 호명된 이름들은 제가끔 고유하면서도 하나의 이름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그 이름들이 뚫고 와야 했던 현실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일단 시작하면 최소 몇백 일은 각오해야 하고, 노숙농성, 옥쇄파업, 단식, 용역과 경찰의 폭력, 구속 그리고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을 정해진 수순처럼 감당해야 하는 이 시대조건 속에서 감히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파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름은 하나였다. 또한 온몸을, 제 삶 전체를 울림통 삼아 외쳐도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 목소리가 국가경제 담론에 파묻혀 타자화됐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름은 따로따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현실이 몇 가지 사소한 사건으로, 개인적 불행으로 치부되지 않고, 구분되지 않는 이름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각인’되면서 새로운 전환이 예비되고 있었는지 모른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85호 크레인 아래는 그 ‘전환’의 징후가 재현되는 자리 같았다. 무대 위로 호명된 이들의 사례 하나하나는 앞선 사례의 단순반복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모두 한자리에서 증언됨으로써, 그것들은 사소한 개인적 불행이 아닌 구조적 동일성 위의 참극으로 인지됐다. 또한 개별 사건들의 단순반복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서사적 통합체를 형성해가는 정향의 징후가 포착됐다. ‘기륭전자 김소연의 1895일과 작은 승리(2)가 없었다면 김진숙의 158일은 어땠을까’라는 물음은 ‘박창수·김주익·곽재규의 죽음(3)이 없었다면 김진숙의 오늘은 어땠을까’라는 물음만큼의 중력으로 당겨졌다. 그것들은 모두 얽혀 떼어낼 수 없고, 표고차는 작지만 모두 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흘러가고 있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의 출현은 확연한 하나의 사건이다. 그들은 ‘희망의 버스’의 문선대(문화선전대)였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인 첫새벽부터 무대를 장악해,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쩌렁쩌렁 노래를 이어갔다. ‘희망의 버스’가 낯선 양식이었다면, 날라리 외부세력은 새로운 차원의 도래로 비쳤다. “진숙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 조건 무조건이야~.”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뽕짝’을 개사해 부르기 시작했고, “사.랑.해.요.김.진.숙.우.윳.빛.깔.김.진.숙”을 선창했다. 85호 크레인 아래의 사람들은 밤새 울고 웃으며 노래에 맞춰 춤을 췄고, 구호를 외쳤다. 그때마다 김진숙은 손을 흔들었고, 아래에서도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35m 높이의 크레인 난간에서 연설을 시작한 김진숙의 목소리는 수없는 망치질과 담금질로 단련된 금속성의 울림이었다. 그런 그녀도 날이 밝도록 그 높은 곳에서 춤을 추었다. 2010년 1월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천막 단식농성을 하면서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나 먹고 싶다던(4) 그녀라면, 85호 크레인에서 뜻을 이루고 내려온 뒤 비트 강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싶어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보이 김진숙! 혼자 생각하다, 홀로 민망해했다. 그래도 분명한 건 김진숙 역시 철없는 날라리들로부터 큰 힘을 얻고 있었고, 그들이 발행한 ‘희망’의 채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들과의 만남을 낯설어하면서도, 그들을 ‘천사’라고 불렀다.(5)&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가장 자본주의적 얼굴을 지닌 대중문화 팬덤 현상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가락과 춤사위를 통해 아침을 여는 풍경은 부둣가의 푸른 이내만큼이나 징후적이었다. 85호 크레인 위의 한 사람과 그 아래 750여 사람을 ‘시대정신’ 같은 근엄한 교집합으로 묶는 건 억지스럽고 시대착오적이다. 김진숙과 날라리들 사이에서 시공간적 동질성을 찾는다는 건 무색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주권에서 추방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이고, 바우만의 잉여인간이자 랑시에르의 몫이 없는 자들인지도 모른다.(6) 그들에게는 치안적 통치 양식에 대항하는 구성주의적 저항과 민주주의의 실질과 다중의 자기지배 역량을 고양하려는 절대민주주의의 요구가 강하다.(7) 그리고 그들은 놀 줄 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6월 27일, 채길용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파업을 접기로 사 쪽과 합의한 뒤, 법원은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조선소 밖으로 끌어냈다. 사법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패대기치기 위해 회사가 돈을 주고 사병으로 부리는 용역들의 힘에 기댐으로써, 정치와 자본이 결탁한 지배 방식을 외설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35m 둥지에는 아직 김진숙이 있고, 크레인 중단부에는 8명의 노동자가 버티고 있다. 행정대집행 뒤 한진 자본이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85호 크레인의 전기를 끊은 것이었다. 그들 역시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눈치챘는지는 모르나, 그것을 전기회로의 일부쯤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8)&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조선소 안과 밖은 무수히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희망의 채권자이자 동시에 채무자로서 서로 개입하고 있다. 아무리 큰 힘과 긴 시간을 들이더라도 2차원의 물리력으로는 그 복잡한 고리를 온전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각자의 현실이 불안할수록, 그들은 체제가 낳은 우점종,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가 되어 다시 더욱 긴 ‘희망의 버스’ 행렬을 이루며 성지순례에 나설 것이다. 85호 크레인은 희망의 성역이고, 그곳에 둥지를 튼 파랑새는 세상의 명물이다. 그 서식지는 일시적으로 파괴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85호 크레인과 파랑새는 이미 도처에 편재하기 때문이다. 애초 버스의 행선지는 ‘희망’이었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글·안영춘&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글은 2011년 7월 4일 새벽에 탈고되었다. 2차 ‘희망의 버스’는 7월 9일 출발한다.&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lt;각주&amp;gt;&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170명의 정리해고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며, 7월 4일 현재 181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 송경동, ‘사람이길 포기 못해 하루씩 쌓은 기륭 1895일’, &amp;lt;르몽드 디플로마티크&amp;gt; 한국판, 2010년 12월호 참조.&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3)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1990년 5월 전노협 탈퇴를 거부하다 구속된 뒤 의문사했다. 김주익 지회장은 2003년 650명의 명예퇴직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 129일간 농성을 벌이다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곽재규 노동자는 13일 뒤 제4도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4) 김진숙, ‘콩국 한 그릇’, 2010년 1월 18일.&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5) 김진숙, ‘바다를 찾아온 육지의 사람’, &amp;lt;한겨레21&amp;gt; 864호, 2011년 6월 13일.&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6) 조정환, &amp;lt;인지자본주의&amp;gt;, 289쪽, 갈무리, 2011년 참조.&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7) 이명원, ‘인지자본주의라는 양날의 칼’, &amp;lt;르몽드 디플로마티크&amp;gt; 한국판, 2011년 5월호 인용.&lt;br /&gt;
&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8) 김진숙은 고공농성을 벌이며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팔로워들과 소통하고 있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lt;div class=&quot;blogger-news-widget&quot; style=&quot;width: 100%; text-align: 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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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gt;</description>
			<category>기사가 된 글</category>
			<category>85호</category>
			<category>85호 크레인</category>
			<category>김진숙</category>
			<category>몫이 없는 자</category>
			<category>소금꽃</category>
			<category>잉여인간</category>
			<category>파랑새</category>
			<category>한진중공업</category>
			<category>호모 루벤스</category>
			<category>호모 사케르</category>
			<category>희망버스</category>
			<category>희망의 버스</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guid>http://jona01.tistory.com/251</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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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1 Jul 2011 10:53:47 +0900</pubDate>
		</item>
		<item>
			<title>드라마 문법으로 본 카이스트 사태</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43</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어느 날 어린 딸아이가 TV를 보다 말고 툭 내뱉는 말이 걸작이었다. “드라마에서 가장 형편없는 죽음은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고 끝낸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유 없는 죽음은 아니다. 드라마를 끝맺어야 하는 제작자가 개연성에 기대어 고민을 간단히 해결하려는, 이유 있는 죽음이다. 드라마뿐이겠는가. 현실 세계에서도 다른 누군가에 의한, 누군가를 위한 개연적 죽음은 숱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최근 카이스트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을 하고, 교수 한 사람도 스스로 목숨을 끊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언론은 흔히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죽음에 등급을 매긴다. 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느 정도 크기로 보도할 것인가…. 입시 스트레스나 좌절로 목숨을 끊는 고등학생이 한 해 줄잡아 100명이 넘지만, 보도되는 경우는 드물다. 카이스트 사태는 일단 ‘등급외 판정’은 면했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선택된 죽음은 이제 해석될 차례다. &amp;lt;조선일보&amp;gt;는 뜬금없이 ‘베르테르 효과’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낭만주의 저널리즘’이라 불릴 만한 이 보도에도 한 가지 미덕은 분명히 있다. 다수 언론이 징벌적 등록금제에 의한 경제적 부담을 자살 원인의 하나로 꼽지만, 나랏돈 한 푼 못 받고 살인적 등록금에 신음하는 다른 대학 학생들이 자살하지 않는 현실과 충돌한다. &amp;lt;조선일보&amp;gt;는 적어도 이런 오류를 비켜간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징벌적 등록금제는 경제형이라기보다는 명예형이다. 일종의 낙인찍기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형적 통치전략이다. 신자유주의의 도덕률은 ‘경쟁’이다. 신성화된 경쟁에 ‘과잉’, 다시 말해 ‘지나친 경쟁’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은 효율 이전에 배제와 이를 통한 훈육이 목적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시켜 본때를 보여야, 신자유주의의 지배질서는 군말 없이 내면화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서남표 총장은 이 참극 앞에서도 “미국 명문대의 자살률은 더 높다”고 말해 설화를 자청했지만, 자살과 경쟁력의 함수관계에 관한 나름의 소신발언이었을 것이다. 고교등급제처럼 경쟁 없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만연한 이른바 명문 사립대들의 현실만 놓고 보면, 그의 가학성에도 명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래봐야 기존 지배질서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공모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FONT-SIZE: 11pt;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 lang=EN-US&gt;&amp;lt;조선일보&amp;gt;는 고교등급제의 음성적 시행에는 한사코 침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유령 제도가 대학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떠든다. 카이스트의 ‘경쟁을 위한 경쟁’을 극구 찬양할 때, 고교등급제도 경쟁지상주의의 일원으로 슬며시 편입된다. 미국의 메이도프 사건이나 티파티 발흥에서 보듯, 신자유주의와 봉건주의의 만남은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이다. 그리고 이 카르텔에서는 카이스트 학생 같은 엘리트도 외부자일 뿐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얼마든지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lt;br /&gt;
&lt;br /&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 1625호(2011년 4월18일)에 실린 글입니다.&lt;/SPAN&gt;&lt;/P&gt;&lt;div class=&quot;blogger-news-widget&quot; style=&quot;width: 100%; text-align: center&quot;&gt;
		  					&lt;embed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quot; quality=&quot;high&quot; flashvars=&quot;nid=15839588&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false&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wmode=&quot;transparent&quot;&gt;&lt;/embed&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고교등급제</category>
			<category>교통사고</category>
			<category>드라마</category>
			<category>베르테르 효과</category>
			<category>자살</category>
			<category>조선일보</category>
			<category>카이스트</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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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43#entry243comment</comments>
			<pubDate>Sun, 17 Apr 2011 13:36: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재스민 혁명 보도가 가리는 것들</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40</link>
			<description>&lt;!--StartFragmen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
&lt;DIV style=&quot;BORDER-BOTTOM: #dbe8fb 1px solid; BORDER-LEFT: #dbe8fb 1px solid; PADDING-BOTTOM: 10px; BACKGROUND-COLOR: #dbe8fb; PADDING-LEFT: 10px; PADDING-RIGHT: 10px; BORDER-TOP: #dbe8fb 1px solid; BORDER-RIGHT: #dbe8fb 1px solid; PADDING-TOP: 10px&quot; class=txc-textbox&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1년 만에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에 글을 다시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미디어 현상에 대한 관심의 집중도가 많이 떨어지고, 신문·방송 보지 않는 낙마저 알아버려, 차질없이 연재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일단, 처방을 하나 내렸습니다. 매주 쓰지 않고 격주로 쓰는 것으로.&amp;nbsp;아무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다시 시작한 연재 첫 번째 글입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lt;/DIV&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br /&gt;
한 시사주간지 최신호 표지 제목은 ‘광기의 종말’이었다.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의 사진이 그 옆에 실렸다. 내가 카다피라면 꽤나 서운할 일이다. 한국 언론은 이전에 그를 미친 사람은커녕 독재자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그가 팬암기 폭탄 테러 의혹을 살 때도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는 한국 기업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따라서 한국 국민의 벗이었다. &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나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 언론에는 존재감이 희미하거나 아예 없다가 이제야 카다피와 더불어 악마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셋 다 실은 처음부터 동격이었다. ‘타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의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나, 인지에서 아예 배제되는 것이나, 타자이기는 매한가지다. &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마그레브(아프리카 북서부)의 혁명 도미노 이후에도 언론은 정합적인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혁명의 첫 번째 배경으로 초장기 독재를 꼽는데, 정작 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난 나라는 그 기간이 22년에 ‘불과’한 튀니지였다. 빈곤 문제도 마찬가지다. 리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과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니 남는 건 절대악의 화신들밖에 없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국 언론이 국제 문제에 관심도 없고 전문성도 취약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른바 ‘재스민 혁명’ 보도의 문제점은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언론이 베끼기에 급급한 서구 언론에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구의 정치·경제적 패권이 이들 나라의 독재체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고, 대다수 서구 언론은 그 이해를 대변해왔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집트와 튀니지의 정권은 친서방 정권이었다. 특히 무바라크는 미국 중동지역 패권의 지렛대였다. 이들 나라의 독재는 서구의 승인을 기반으로 했고, 그 대가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수용해 국제투기자본의 배를 불려줬다.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카다피조차 대테러 분야에서 미국과 공조한 뒤로 여러모로 서구의 음덕을 입어왔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서구 언론의 보도는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혁명이 극심해진 억압과 그로 인한 수탈 및 빈부격차 심화에서 비롯됐다는 동학적 차원에서의 접근 대신, 세 명의 악마를 나란히 전시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문제를 ‘체제’가 아니라 ‘사람’으로 설정함으로써, 인물 교체 이후 지속적인 통제를 노리는 서구의 의도를 투영한 것이다. &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럼 한국 언론은 순전히 무지의 피해자일까. 유엔으로부터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를 받고, 외국자본에 팔아넘긴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와 가족 10여명이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하고, 고용 없는 성장으로 고학력 청년실업이 넘쳐나는 현실이 들려주는 얘기는 다르다. 마그레브의 타자는 우리 안의 타자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
&lt;/DIV&gt;&lt;div class=&quot;blogger-news-widget&quot; style=&quot;width: 100%; text-align: center&quot;&gt;
		  					&lt;embed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quot; quality=&quot;high&quot; flashvars=&quot;nid=14537389&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false&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wmode=&quot;transparent&quot;&gt;&lt;/embed&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언론</category>
			<category>재스민혁명</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guid>http://jona01.tistory.com/240</guid>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40#entry240comment</comments>
			<pubDate>Mon, 07 Mar 2011 11:12: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선거에서 월드컵에게로</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25</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6월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읽기]&lt;/STRONG&gt;&lt;br /&gt;
&lt;br /&gt;
&lt;DIV class=txc-textbox style=&quot;BORDER-RIGHT: #79a5e4 1px dashed; PADDING-RIGHT: 10px; BORDER-TOP: #79a5e4 1px dashed;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BORDER-LEFT: #79a5e4 1px dashed; PADDING-TOP: 10px; BORDER-BOTTOM: #79a5e4 1px dashed; BACKGROUND-COLOR: #dbe8fb&quot;&gt;&amp;lt;르몽드 디플로마티크&amp;gt; 6월호를 6월 1일 새벽 5시에 마감했다.&lt;br /&gt;
해가 길어졌다.&lt;br /&gt;
어제 새벽에는 동트는 것을 보고 퇴근했는데, 오늘 새벽엔 동트는 것을 보며 숙직실로 간다.&lt;br /&gt;
아래는 6월호 소개글이다.&lt;br /&gt;
독자들이여, 많이 사봐달라.&lt;br /&gt;
지속가능한 밤샘을 위해!&lt;br /&gt;
&lt;/DIV&gt;&lt;br /&gt;
&lt;br /&gt;&lt;/DIV&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6월은 4년에 한 번 꼴로 월드컵의 달이 된다. 축구공 하나를 놓고 푸른 행성(머잖아 화석이 될지 모를 이름이지만) 전체가 한 달 내내 열병을 앓는 풍경을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그 우주인이 메시나 호날두라도, 무척 낯설어 할 것이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 &lt;/SPAN&gt;&lt;?xml:namespace prefix = o ns = &quot;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quot;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렇다고 월드컵이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는 건 부질없어 보인다. 축구는 괜찮지만 월드컵은 아니다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사자는 괜찮지만 세렝게티에서 누를 사냥하는 사자떼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축제는, 강요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싫어하는 건 자유다), 이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비이성적이어서 축제고, 탈일상적이어서 축제다. 축제의 기능이 한시적 일탈을 허용해 지배체제의 지속가능성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만, 혁명을 위해 모든 노동자를 금욕주의자로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지켜볼 일이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러나 월드컵은 나쁘다. 비이성적이서도, 탈일상적이서도, 체제에 복무해서도 아니다. 월드컵을 타락시키는 건 놀랍게도 ‘이성’이다. 월드컵을 싫어하는 당신이 올 6월엔 TV에서 축구 경기 대신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빼고 나면, 그 이성은 욕망을 실현할 수단을 가진 극소수에게만 좋은 것이다. 이를테면 국제축구연맹(FIFA)의 과두 참주들, 월드컵을 마케팅의 시공간으로만 보는 거대기업과 방송사들은 돈의 욕망을 좇는 도구적 이성으로 월드컵과 그 축제에 빠진 수많은 이들을 눈치 못채게 욕보인다. 그들은 자기네끼리 뒤를 봐주고 먹이사슬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공통적으로 부패한다(4~5면).&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부패는 음지식물이 아니다. ‘일상의 외설’처럼 근엄한 양지에서 자란다. 부패는 햇빛 아래의 우점종이다. 정경유착은 한국 사회만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아닌 듯하다. &amp;lt;르몽드 디플로마티크&amp;gt; 프랑스판 6월호가 ‘황금 과두체제 시대’라는 대형 특집(12~19면)을 마련한 것은, 그만큼 전 세계 곳곳에 사례가 풍부했다는 방증일 터이다. 정경유착이 이른바 후진국만의 질병이라는 생각은 서구가 만들어내 이식한 이데올로기, 오리엔탈리즘이다. &amp;lt;르 디플로&amp;gt;에는 서구 국가의 얘기가 훨씬 많다. 그런 나라일수록 금권 부패는 제도 안에서 대담하게 서식한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한국의 부패 양태도 이제 ’G’(주요국)의 자격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는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길. 대신 &amp;lt;르 디플로&amp;gt; 한국판은 ‘대한민국 국격을 높이기 위해’ 열린다는 올가을 서울 G20 정상회의를 따져봤다(32면). 세계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G8을 대체했다는 G20은, 그러나 경제위기의 원인이자 위기 자체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집행기구들에게 되레 힘을 실어주려 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는 도무지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높은 인물들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지도, 미국이 유럽에 어깃장을 놓지 않았다면 한국이 이 서클에 들지 못했을 거라는 귀띔과 함께 들어볼 수 있다.&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 &lt;/SPAN&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11pt; 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4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월드컵의 달은 한국에선 지방자치선거의 달이기도 하다. FIFA 일속이 스포츠 축제를 능욕할 때 한국의 정치 축제도 온전하지는 않았다(1, 28~29면). 그래도 교육감은 투표하신 후보가 당선됐는지 모르겠다. 어떤 후보들의 ‘교육 정상화’ 구호는 경찰이 진을 친 뉴욕의 학교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1, 7면). 6월이면 꽃도 거의 지고, 봄은 다 간 것 같다. 그래도 6월엔 찔레꽃이 앞을 맡고 능소화가 뒤를 이어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꽃들과 더불어 한 해를 나는 것이다. 지금 &amp;lt;르 디플로&amp;gt;와 희망을 얘기하자면 굳이 그런 것이다.&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lt;o:p&gt;&lt;/o:p&gt;&lt;/P&gt;&lt;div class=&quot;blogger-news-widget&quot; style=&quot;width: 100%; text-align: center&quot;&gt;
		  					&lt;embed src=&quot;http://api.v.daum.net/static/recombox1.swf&quot; quality=&quot;high&quot; flashvars=&quot;nid=7308484&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false&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80&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wmode=&quot;transparent&quot;&gt;&lt;/embed&gt;
						&lt;/div&gt;</description>
			<category>기사가 된 글</category>
			<category>FIFA</category>
			<category>g20</category>
			<category>교육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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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지방자치선거</category>
			<category>호날두</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guid>http://jona01.tistory.com/225</guid>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25#entry225comment</comments>
			<pubDate>Wed, 02 Jun 2010 05:10:1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난 마지못해, 기웃거리며 트위터 한다</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6</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트위터, 당신의 삶은 '스마트' 하십니까?]&lt;br /&gt;
&lt;/SPAN&gt;&lt;/STRONG&gt;&lt;br /&gt;

&lt;DIV class=txc-textbox style=&quot;BORDER-RIGHT: #79a5e4 1px dashed; PADDING-RIGHT: 10px; BORDER-TOP: #79a5e4 1px dashed;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BORDER-LEFT: #79a5e4 1px dashed; PADDING-TOP: 10px; BORDER-BOTTOM: #79a5e4 1px dashed; BACKGROUND-COLOR: #dbe8fb&quot;&gt;
&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편집자주=신드롬(syndrome)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공통된 질환, 장애 등으로 이루어지는 일군의 증상’을 일컫는다. ‘트위터’(twitter)는 어떠한가? 스마트폰 출시 이후 트위터는 하나의 신드롬적 기호로 맹렬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트위터를 미지의 미디어 환경 도래에 앞서 떠밀려온 빙산의 일각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열린 즐거움의 한 경지라고도 한다. 당신은 ‘트위터리안’인가? 혹시, 블로거라는 호칭에도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영 삶이 ‘스마트’하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한 상태는 아닌가?&lt;/DIV&gt;
&lt;DIV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lt;미디어스&amp;gt;에서 트위터 신드롬의 현재 진행형을 추적하고자 한다. 과연, 트위터는 일방적 언론 장악의 상황에 맞서 정보유통의 민주화라고 하는 공통된 꿈을 향해 가는 상징의 영토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브랜드가 또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가는 기착의 프로그램일는지 다양한 트위터리안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 진화의 현장을 기록하고자 한다.&lt;/DIV&gt;&lt;/DIV&gt;&lt;br /&gt;
&lt;br /&gt;&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교수 한 분께 전화를 드렸다. (그는 트위터만 이용해 배우 장동건을 만나겠다는 야무진 자체 문화운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lt;/SPAN&gt;&lt;br /&gt;
&lt;/FONT&gt;&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선생님, 산엔 잘 다녀오셨어요?”&lt;/SPAN&gt;&lt;br /&gt;
&lt;/FONT&gt;&lt;/SPAN&gt;&lt;FONT color=#000000&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어이쿠! 지금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리만 하면 되니까 오늘 안에 보내드릴게요.”&lt;/SPAN&gt;&lt;br /&gt;
&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허허. 부담 드리려는 게 아닌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lt;/SPAN&gt;&lt;/SPAN&gt;&lt;/FONT&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이 짧은 대화 속에는 트위터가 쳐놓은 괄호가 있다. 나는 그날 그로부터 받을 원고가 있었고, 그의 트위터에는 ‘오전에 북한산에 다녀오겠다’는 짧은 글이 아침부터 올라와 있었다. 그가 제때 원고를 보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나는 트위터 덕분에 빚쟁이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채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는 빚쟁이라니…. 나만의 트위터 용도를 체감하는 기회였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cfile5.uf.tistory.com/image/18576B154BE7980F62254A&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1.jpg&quot; height=&quot;295&quot; width=&quot;500&quot;/&gt;&lt;/div&gt;&lt;br /&gt;
색다른 경험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내 딴에는 리트윗을 한다고 하는데, 누군가 내게 이런 리트윗을 해왔다. ‘근데 누구 앞으로 리트윗을 하신 거예요?’ 나는 그때까지도 리트윗을 할 때면 글 쓸 공간에 자동으로 디폴트돼 있는 글을 깨끗이 지운 다음 내 할 말만 했던 것이다. 이런 지적이 나오자, 당신이 뭘 모르고 있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리트윗에서 호명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리트윗이 줄줄이 떴다. 이런 이타적 트윗쟁이들 같으니라고!&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그러나 거기까지다. 내 게으름 탓이 크겠지만, 더는 트위터에서 새로운 감동을 받아보지 못했다. 내가 트위터를 시작한 지는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처음 올린 글이 이랬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난 한때 온라인 글쓰기에서 재미 좀 봤다. 그러다 블로그 바람이 불면서 도태됐다. 주변에선 말했다. 긴 문장, 어려운 표현, 띄엄띄엄 포스팅…. 실패의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다고. 트위터 시작한다. 내가 시대를 배신하는지 시대가 날 배신하는지, 보자!”&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트위터를 시작하며 이런 글부터 올린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 mso-fareast-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선배가 커피를 마시는 것 보면 참 신기해요.” 주위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할 만큼, 난 동시대 사람들의 보편적 흥미와 기호에 좀처럼 동승하지 못하는 체질이다. 다른 후배한테서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선배가 (핸드폰) 문자를 그렇게 빨리 입력하는 걸 보면 신기해요.” 내가 4벌식 자판을 두드리던 타자병 출신이어서 자판의 변용에는 익숙한 편이다. 다만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띄어쓰기와 구두점 찍기를 원고지 쓸 때만큼 정확히 구사하다 보니, 남들 같으면 일반 메시지로 보낼 수 있는 것도 컬러 메일로 보내야 하는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된다. 내 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포크 가요가 100곡쯤 저장된 시디가 있다. 주야장천 같은 시디만 돌려대다 보니 내 차를 자주 얻어 타는 이로부터 “지겹지도 않으냐”는 지청구를 듣기도 한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다시 말하지만 이건 무슨 신념도 아니고, 그저 체질이다. 난 여러 유형의 매체(일간지, 시사주간지, 온라인, 지상파, 다시 온라인, 그리고 월간지)를 업으로 삼아 전전해왔지만, 종이가 가장 체질에 맞는다. 그런 내가 한 달 전 트위터를 시작한 것은, 그리고 이태 전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하나의 이유에서다. 트위터든 블로그든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얼리 어덥터들의 캐치프레이즈. “정보 유통의 민주화!” 그저 ‘이거 재밌으니 해보라’고만 했거나, 혹은 ‘이거 하면 돈 된다’고 했으면 아무 부담 없이 눈길을 거두었을 것을, ‘민주화’라니. 그것은 내 신념을 직접 지시하는 정치적 계몽의 장치였다. 좋든 싫든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 멀미를 하더라도 그 배에 올라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배 위에서도 쭈뼛거린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블로그와 트위터가 구현해야 하는 정보 유통의 민주화는 달리 말해, 기존 독과점의 해체다. 소수 언론자본이 지배하는 담론시장에서 누구라도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커뮤니케이션사에서 분명 획기적인 진전이다. 그러나 블로그와 트위터가 기존 독과점을 해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기존 미디어의 성채에 균열을 가하는 대항매체로서의 존재감은 2년 전 촛불정국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숙주 삼아야 하는 존재 방식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 역설적으로, 조·중·동이 없으면 블로그와 트위터도 없다. ‘반정립’으로 밀고 나아가기에는 힘이 달리고, ‘관계 조정’ 정도가 현실성 있는 최대치로 보인다. &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정치적 실천과 재미에 대한 이원적 인식은 이제 미망이 된 시대다. 서울시청 앞을 ‘정권 타도’ 구호와 민중가요 대신 ‘대~한민국’과 대중가요로 전유할 수 있었던 경험은, 공간을 정치투쟁으로만 환기할 줄 알았던 세대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페이지뷰와 댓글을 통해 실시간으로 피드백되는 블로그에는 분명 이들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엿보인다. 그러나 실천과 재미의 관계가 재설정되었다고 해도, 재미가 표준화·획일화되는 일은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블로그에서 시사적 소재의 글은 예찬될지언정, 페이지뷰와 댓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단연 연예 관련 글이다. 소비사회의 문화양식이 그대로, 아니 오히려 확대돼 투영되고 있다. 더욱이 기존 독과점 매체의 탈정치화가 규율권력의 기획이라면, 블로그의 빌보드화는 지배질서를 내면화한 대중의 자발적 발화다. 내면화된 복종과 그 복종의 전시는 지배체제의 폐쇄회로를 완성시킨다. 소수의 스타와 다수의 팬덤으로 형성되는 담론 구조 속에서 ‘중간’의 서식 공간이 너무 협애한 것도 문제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와 트위터가 정보 유통의 기득권에 대한 대항 체계이기에 앞서, 내부 투쟁이 선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유통 체계라고 본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이마저도 나는 실천과 재미를 이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대표적인 시사 파워 블로거인(그리고 지금은 파워 트위터이기도 한) 고재열 기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글을 포스팅하는가?”라고. 그의 대답은 해석의 여백이 없이 꽉 차 있었다. “안 먹고 안 자고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뇌리를 스쳤다. 그가 오로지 와신상담하듯 안 먹고 안 자면서 블로그와 트위터를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블로그와 트위터는 실천과 재미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일 터이다. 그렇지만 블로그나 트위터에서 재미를 못 느끼는 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든 재미를 요구하든, 그것은 또 하나의 타자화가 아닐까.&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그렇다고 그가, 그리고 블로그와 트위터를 예찬하는 이들이 내게 직접 요구한 적은 없다. 솔직히 내가 앞에서 늘어놓은 ‘체질’에 관한 주장은 정작 용렬한 ‘역량’에 대한 자기변명인지 모른다. 그걸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은 트위터에서다. 블로그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정보 유통 권력을 행사했던 포털의 손아귀에서 이 ‘수다기계’가 벗어난 것은 내러티브 독점의 해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내게 소설의 시대에서 시의 시대로의 귀환을 예고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복잡한 시사적 맥락을 몇 마디의 감정적 표현에 온전히 내포하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는 공명의 울림판으로 삼는 역량은, 미학을 넘어서 각별히 내공이라고 불러야 옳다. 그럴 재간이 내겐 없다. 나는 겨우 서술한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00&gt;인문학 파워 블로거인 이택광 교수에게 편지로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수준의 글을 거의 매일 같이 포스팅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여백이 컸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과연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걸까. 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홈페이지 ‘평산장해K’(http://www.jk.ne.kr/in-1.html)는 블로그의 전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으나, 온라인도 얼마나 고졸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이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바는, 마셜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을 타기하거나 넘어선다. 블로그의 시대든 트위터의 시대든, 이들의 인문과 사유에는 걸림이 없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결R; mso-ascii-font-family: 결R; mso-hansi-font-family: 결R&quot;&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나는 정보 유통의 민주화에 대한 계몽적 요구와, 산과 물의 분별을 넘어서는 지적 경지 모두를 기웃거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지못해. 나는 이것을 스스로 곤경이라고 부른다. 과연 돌파할 수 있을까.&lt;/SPAN&gt;&lt;br /&gt;
&lt;/FONT&gt;&lt;br /&gt;
&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FONT color=#5c7fb0&gt;※ 이 글은 &amp;lt;미디어스&amp;gt;(&lt;/FONT&gt;&lt;/SPAN&gt;&lt;A href=&quot;http://www.mediaus.co.kr&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FONT color=#5c7fb0&gt;www.mediaus.co.kr&lt;/FON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quot;&gt;&lt;FONT color=#5c7fb0&gt;)에 실렸습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고재열</category>
			<category>김영민</category>
			<category>블로그</category>
			<category>이택광</category>
			<category>트위터</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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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16#entry216comment</comments>
			<pubDate>Tue, 13 Apr 2010 14:29:2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경향 칼럼 사태로 본 언론자유의 변증법</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5</link>
			<description>&lt;P&gt;“과거 언론 자유를 위협한 세력은 정치권력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원천적이며 영구적 권력인 자본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lt;/P&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uf.tistory.com/image/1353350C4B861C5E34897C&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4.jpg&quot; height=&quot;340&quot; width=&quot;315&quot;/&gt;&lt;/div&gt;언론인 김중배가 1991년 &amp;lt;동아일보&amp;gt; 편집국장을 그만두며 내뱉었던 일성이다. 언론의 자유를 언제든 경제적 이익과 엿 바꿔 먹을 수 있는 화폐쯤으로 여겨온 기회주의 언론들의 거대 자본에 대한 부역의 역사는 그렇게 20년이 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김중배의 경계(警戒)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amp;lt;경향신문&amp;gt;이 김용철 변호사의 신간 &amp;lt;삼성을 생각한다&amp;gt;와 관련한 외부 필자 칼럼을 통째로 드러낸 사건은 이른바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신문들까지 자본의 손아귀에 멱살 잡힌 현실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한다.&lt;/P&gt;
&lt;P&gt;부자 언론은 언론의 자유 따위엔 관심이 없고 가난한 언론은 자유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한국만의 사정이 아니다. 진보적인 언론일수록 경영난이 심각한 것은 세계적 추세다. 프랑스 68혁명의 상징이자 사원 공동경영으로 유명했던 좌파 일간지 &amp;lt;리베라시옹&amp;gt;은 2007년 초 로스차일드은행이라는 금융 자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amp;lt;한겨레&amp;gt;나 &amp;lt;경향신문&amp;gt;의 소유권이 아직 자본에게 넘어가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lt;/P&gt;
&lt;P&gt;과거 한국의 자본들이 신문을 소유하려고 했던 것은 비정상적인 기업 경영의 방패막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신문들은 자본들의 그런 욕망조차 자극하지 못할 만큼 위상이 피폐해 있다. 그리고 어떤 신문인들은 그런 현실에 더 낙담하지 않을까. 행여 삼성이 다시 광고를 줄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신문 칼럼을 통째로 들어내는 것과 삼성에서 월급을 받으며 삼성의 나팔수가 되는 것 사이에서 언론 자유의 우위를 재는 건 무참하다. 한국 진보신문의 남루한 현주소를 의지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비관적으로 직시하는 것, 희망이 있다면 비로소 그 위에 있을 것이다.&lt;/P&gt;
&lt;P&gt;언론인 홍세화에 따르면, 희망의 근거는 긴장(緊張) 위에 있다. 원칙을 지키되(緊), 도그마에 빠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현실인식(張). ‘긴장’은 변증법의 언어다. 일회적인 언론의 자유를 행사하고 장렬하게 죽을 자유는 한국의 남루한 언론 지형에선 그나마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사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신문은 자신의 긴장을 실천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연장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삼성 비판 칼럼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 삭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lt;/P&gt;
&lt;P&gt;그리고 그 유예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독자들이 움직여야 할 때다. 한국 진보신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에 필요한 더 많은 유료독자다.&lt;/P&gt;
&lt;P&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에 실린 글입니다.&lt;br /&gt;
&lt;/P&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경향신문</category>
			<category>김상봉</category>
			<category>김용철</category>
			<category>김중배</category>
			<category>삼성</category>
			<category>삼성을 생각한다</category>
			<category>진보신문</category>
			<category>진보언론</category>
			<category>칼럼</category>
			<category>한겨레</category>
			<category>홍세화</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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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15#entry215comment</comments>
			<pubDate>Thu, 25 Feb 2010 15:46:05 +0900</pubDate>
		</item>
		<item>
			<title>MBC엔 어처구니가 살았다</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3</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어처구니없다’의 어근 ‘어처구니’는 그 어원부터 어처구니없다. 옛사람들은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불렀다. 맷돌을 돌리려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이처럼 기원이나 쓰임, 꼴 등이 사전적 의미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빚어내는 표현이 더러 있다. ‘숲’의 경우 글꼴과 소리가 저절로 숲의 시청각적 이미지를 재현하는 절묘한 기호다. 그러나 ‘숲’도 더는 ‘어처구니’에 필적할 수 없게 됐다. ‘어처구니’는 최근 ‘아이러니의 언어’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라는 오프닝 코멘트로 유명한 앵커 출신 방송사 사장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말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cfile25.uf.tistory.com/image/17617F124B74B6107459AC&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1.jpg&quot; height=&quot;377&quot; width=&quot;300&quot;/&gt;&lt;/div&gt;저널리즘에서 ‘어처구니없다’는 그다지 친숙한 표현은 아니다. 무엇보다 객관주의적이지 않다. 그나마 앵커 코멘트이었기에 망정이지, 기자 리포트에서 이런 주관적 표현은 금기다. 물론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그 자체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진실에의 접근을 방해하는 ‘신화’로 작동하곤 한다. 이에 견줘 “어처구니없다”라는 앵커 코멘트는 개념화의 공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러했기에, 상식을 배반한 사태에 대해 더욱 보편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하지만 ‘어처구니없다’에 관한 한 가장 탁월한 저널리즘적 용례를 제시했던 그 앵커 출신 사장이 정권에서 파견한 참주들(방송문화진흥회 여당 추천 이사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능욕을 당하고 물러난 아이러니에는 ‘어처구니없다’의 저널리즘적 한계가 숨어 있다. ‘어처구니없다’는 사태의 맥락성에 충분히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신음 또는 탄식에 가까운 이 발화(發話)는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이성적 사유와 정서적 공명, 이에 따른 실천으로의 확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서 “어처구니없다”는 이슈 사이를 부유하며 스펙터클만 전시하는 방송 저널리즘의 자기고백이기도 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은 민주주의 근간에 대한 위협이다. 앵커 출신 방송사 사장은 자신에게 가해진 저열한 압력을 어떻게 풀이했을까? 개인이나 방송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지만, 공영방송과 언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도 받아들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유와 공명과 실천에 관한 ‘어처구니없다’의 한계는 다시금 명확하다. 그가 당했을 숱한 협박과 회유에 대해 제대로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나 36년 동안 몸담았던 방송사를 떠나며 “MBC 파이팅”을 외치고 만 것을 보면 그의 싸움이 ‘애사심’에 머문 것은 아니었는지 회의가 든다. MBC를 또 하나의 방송 기업으로만 보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lt;br /&gt;
&lt;br /&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 제 1573호에 실린 글입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
&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MBC</category>
			<category>객관주의</category>
			<category>방문진</category>
			<category>신화</category>
			<category>어처구니</category>
			<category>언론자유</category>
			<category>엄기영</category>
			<category>저널리즘</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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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13#entry213comment</comments>
			<pubDate>Fri, 12 Feb 2010 10:51:5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바보야, 문제는 ‘공정성’이야!</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2</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저널리즘에서 ‘아’와 ‘어’의 차이 사유하기&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표면적으로 모음 한 획이 좌우 대칭일 뿐이지만, 저널리즘에서는 본질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아’와 ‘어’는 표상되는 대상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대상을 표상하는 질감이 다른 것이다. 저널리즘에서는 뉘앙스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맥락의 차이일 수도 있다. 굶주림에 지친 장발장이 빵을 훔쳤을 때,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 사이에 절도 행위와 관련한 육하원칙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는 이 여섯 가지의 요소 가운데 무엇을 눈여겨보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장발장이라는 존재의 사회적 평판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저널리즘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은 흔히 하나의 짝으로 인식되고, 심지어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객관성과 공정성은 ‘아’와 ‘어’보다도 차이가 크다. 진화론적으로 말하면 객관성과 공정성은 상동기관이 아니라 상사기관이다. 고래와 말처럼 겉모양이 멀어도 기원은 가까운 게 아니라, 독수리와 박쥐마냥 도무지 조상이 닿지 않는다는 얘기다. 객관성은 형식의 규범이고, 공정성은 내용의 규범이다. 객관성은 형식을 빌려 대상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이고, 공정성은 왜곡 없이 진실에 다가가려는 것이다. 그 멀어지려는 지향과 다가가려는 지향으로 둘은 상호 길항적인 이항대립의 긴장 위에 놓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cfile7.uf.tistory.com/image/155AE20C4B6F85C604989E&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201002_04_03.jpg&quot; height=&quot;400&quot; width=&quot;600&quot;/&gt;&lt;/div&gt;&lt;br /&gt;
방송 기자가 비행기를 타고 ‘강요된 재앙’의 현장 아이티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119 구조대원과, 그들의 뒤를 보살펴야 하는 대사는 방송 기자 앞에서 각자의 얘기를 했다. 기자가 옮긴 각자의 말의 일부분은 적어도 파편적 사실로서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 파편적 사실이 몽타주라는 편집 기술과 만나면서, 어느 한쪽은 헌신을 하고도 천대받는 무구한 존재로, 다른 한쪽은 참극의 현장에서 국록으로 회의호식하며 타인의 숭고한 행위를 조롱하는 파렴치한으로 재현되었다. ‘아’와 ‘어’는 그렇게 달랐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공정성을 사유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최근 청와대에서 연출됐다. 방송 기자 출신인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연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고 했던 말을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로 옮겼다. 논란이 불거진 뒤 청와대 쪽에서 내놓은 해명은 ‘개떡 같이 말한 것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옮겼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뉘앙스와 맥락으로 타당성을 따져봐야 한다. 이를테면 지금은 고인이 된 직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한 푸념을 대통령의 하야 의사 표명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경우는 어떤가?&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몽타주 장난질보다 더 나쁜 건 파편적 사실조차 왜곡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의 말씀이고, 푸념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외신 앞에서 정색하고 했던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 제1572호(2010-02-08)에 실린 글입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MBC</category>
			<category>공정성</category>
			<category>김은혜</category>
			<category>몽타주</category>
			<category>아이티</category>
			<category>왜곡</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guid>http://jona01.tistory.com/212</guid>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12#entry212comment</comments>
			<pubDate>Mon, 08 Feb 2010 12:32:4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아이티는 상처입은 야수인가?</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1</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주류언론의 현지 르포, 약자를 타자화하는 지배윤리의 시선&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선량한 시민과 폭도는 구별되지 않았다. 아이티 대지진 엿새째. 외국 구호단체를 반기는 것은 굶주린 손길이 아니라 이성을 잃은 약탈자들의 정글칼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cfile29.uf.tistory.com/image/146BCB114B6683F816826B&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1.jpg&quot; height=&quot;464&quot; width=&quot;550&quot;/&gt;&lt;/div&gt;&lt;br /&gt;
지난 1월 19일 &amp;lt;조선일보&amp;gt; 1면 기사의 첫 단락이다. 기사 위에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무너진 상점 앞에서 시민들이 물품을 차지하려고 서로 드잡이하는 사진이 실렸다. 사진은 군중 가운데 칼을 들고 상대를 위협하는 남성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기사의 제목은 ‘그들의 눈빛이 변해간다’였다. 이 인상적인 문장과 사진, 제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약대 구실을 하며 삼위일체의 매우 강력한 이미지를 구성한다. ‘인면수심’.&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아이티 현지에서 쓴 르포기사지만, 이 신문의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고 있다. 기자가 서있는 공간과 그의 의식의 입각지점은 심각하게 어긋난다. 그에게는 실존의 벼랑 끝에 몰린 아이티인들의 참극이 안정된 사회의 도덕규범보다 후순위에 놓인다. 굶주린 손길은 외국 구호단체 앞에서 질서정연한 환영의 손짓이어야 옳다. 아이티인들은 그렇지 못한 존재이기에, 이번 자연재해는 그들의 야만성에 대한 초자연적 징치일 수 있다는 개연성이 열린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것이 과장된 해석만은 아니라는 건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근본주의자 팻 로버트슨 목사가 내뱉은 말을 통해 입증된다. “독립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아이티에 대한 신의 저주!”(&amp;lt;한겨레&amp;gt; 1월 27일자 ‘곽병찬 칼럼’ 재인용). 부두교가 서구제국에 맞선 아이티 흑인노예 해방전쟁의 구심점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자. 부두교에서 권선징악의 상징요소인 좀비가 할리우드에서 악의 화신으로 둔갑하는 사정은 숫제 우연일까.&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아이티가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뒤 미국의 봉쇄정책과 영토 침략, 쿠데타 배후조종 등 잇단 폭압 때문에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amp;lt;조선일보&amp;gt;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령 아이티인들 일부에게 질서정연한 지배규범이 내면화되지 못했다고 해도, 그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지 않다. 이 조그마한 섬나라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그 정글을 지배해왔던 이들에게 마땅히 훨씬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lt;조선일보&amp;gt;나 로버트슨 목사의 시선은 정작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고 있다. 정상성의 내부에서 바라볼 때, 외부로 배제된 타자는 인면수심이자 악마에게 영혼을 판 노예로 재현된다. 그들이 내민 구호의 손길 뒤에 정글칼이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에게 아이티인들에 대한 연대감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1면부터 대서특필하던 아이티 참사가 &amp;lt;PD수첩&amp;gt; 1심 판결 하나 때문에 지면에서 종적을 감추다시피한 사태를 이해할 길이 없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 제1571호(2010-02-01)에 실린 글입니다.&amp;nbsp;&lt;br /&gt;
&lt;/P&gt;</description>
			<category>발표글</category>
			<category>pd수첩</category>
			<category>근본주의</category>
			<category>아이티</category>
			<category>조선일보</category>
			<category>타자</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guid>http://jona01.tistory.com/211</guid>
			<comments>http://jona01.tistory.com/211#entry211comment</comments>
			<pubDate>Mon, 01 Feb 2010 16:35:1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세종시와 KBS 시청료 인상의 함수관계</title>
			<link>http://jona01.tistory.com/210</link>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uf.tistory.com/image/144795034B53D88C57420B&quot; alt=&quot;&quot; filemime=&quot;image/jpeg&quot; filename=&quot;대동여지전도.jpg&quot; height=&quot;499&quot; width=&quot;300&quot;/&gt;&lt;/div&gt;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을 관습헌법이 지배하는 나라로 둔갑시켜 행정수도 이전을 가로막았던 5년 전이나, 대통령과 그의 국무총리의 ‘의연하고 당당한’ 일방통행으로 행정도시가 백지화 위기에 몰린 오늘이나, 그들이 끝내 집착하는 건 ‘중앙’이라는 단 하나의 상징이다. ‘권력의 공간’으로서 중앙은 지리적으로 곧 ‘서울’이다. 서울이 아닌 곳은 모두 ‘지방’일 뿐이다. 서울대가 한국대로 개명하지 않고도 한국 고등교육 자원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도, 서울지역에 소재하지 않은 대학은 ‘지방대’라는 메타명칭으로 묶여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앙의 공간적 해체는 권력을 내려놓는 것에 견줄 만한 일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세종시를 ‘관제 기업도시’로 만들려는 정부의 행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엄청난 혼란과 비용을 감내했던 서방국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서울을 제외한 한반도 남쪽 전체가 서울에 의해 식민화된 공간이니 이런 비유가 그닥 과장은 아닐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업들에게 전례 없는 파격 특혜를 줘가며 돈은 돈대로 들이고 차별 시비까지 자청하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다. ‘중앙-서울-권력’의 삼각동맹을 묶어둘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비용과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이젠 형평성 문제 때문에 다른 지역에도 ‘원형지 개발’ 방식을 적용하겠다고 하니, 토지 덤핑에 의한 전국토의 사유화도 멀지 않은 듯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직후, 이른바 중앙언론들은 환영일색으로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그들 역시 삼각동맹의 주요 일원이니 존재론적으로는 당연한 태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종시 수정안은 온나라를 제로섬 게임의 각축장으로 바꿔놓았다. 새만금과 기업도시, 혁신도시들이 자신들이 점찍어둔 기업들을 세종시에 빼앗길 처지가 되자 죽기살기로 덤비고 있다. 국회 통과도 예단할 수 없는 처지다. 이튿날부터 중앙언론들도 반대 목소리를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자칫 줄을 잘못 섰다가는 집토끼도 산토끼도 모두 잃을 수 있는데, 신중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정부는 방송 정책도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KBS ‘시청료’(그들 표현으로는 ‘수신료’)를 두 배 올리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정작 KBS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청료를 올리는 대신 광고를 못하게 해, 새로 방송시장에 진입하는 종합편성채널에 더 많은 광고를 몰아주겠다는 계산이다. 일부 중앙일간지들의 신장개업을 위해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꼴이다. 기업에 황홀경의 혜택을 주기 위해 국민 세금을 쏟아 붓는 ‘세종시 셈법’과 너무나 똑같다. 5공 때처럼 시청료 거부운동이 일어날 태세다. 중앙에 맞서, 식민지 백성들의 반란이 시작되려는 것인가.&lt;/P&gt;
&lt;P&gt;※ &amp;lt;한국방송대학보&amp;gt;&amp;nbsp;제1570호(2010-01-18)에 실린 글입니다.&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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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nbsp;&lt;/P&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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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종합편성채널</category>
			<category>중앙</category>
			<author>지독한 정상</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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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8 Jan 2010 12:42:2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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